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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평야가 서해가 됐잖소" 수심에 가득 찬 농심
"나주평야가 서해가 됐잖소" 수심에 가득 찬 농심
  • 바른경제
  • 승인 2020.08.0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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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훈 기자 = "저게 어딜봐서 논이요? 서해 바다가 따로 없제."

9일 오후 전남 나주시 다시면 죽산리 죽지마을 앞 논을 바라보던 이재대(72)씨는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여름 벼가 한창 자라야 할 논에는 흙탕물이 가득 차, 바람에 넘실대고 있었다.

영산강변 비옥한 땅에서 대대로 벼농사를 지어온 마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평야가 흙탕물 바다로 변한 것은 전날 오전 9시부터 인근 영산강 문평천 제방이 범람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영산강 수위가 높아지며 불어난 강물은 지류 하천으로 역류했다. 만조시간대와 겹치면서 같은날 오후 3시30분께 제방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삽시간에 물이 복암·가흥·죽산리 일대의 민가를 덮치자, 주민들은 인근 초등학교로 몸을 피했다.

하룻밤을 뜬 눈으로 새고 삶의 터전으로 돌아온 주민들은 망연자실했다. 마을까지 지척이면 갈 도로에 물이 빠지지 않아 10여㎞를 우회해야 했다.

죽지마을에서도 40여 가구 중 지대가 높은 집 몇 채를 빼고 모두 침수됐다. 사방에 깨진 유리문과 흙이 묻은 가구·가전제품 등이 뒹굴었다.

주민들은 굴삭기·지게차를 동원해 본격적인 복구 작업을 벌이며 구슬땀을 흘렸다.


반면 논은 손 쓸 도리조차 없어 농민들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30년 넘게 벼농사를 지어온 이씨는 하염없이 흙탕물이 들어찬 논만 바라봤다.

논이 통째로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둑방을 터 임시 수로를 내고 양수기를 동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나마 논으로 접근할 농로에 들어찬 물을 굴삭기로 퍼내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조금씩 물이 빠진 벼도 물에 반쯤 잠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사이사이에는 비료 포대 등 농자재가 물 위에 떠 있었다.

인근 배수장 역시 침수돼 전기 펌프가 가동되지 않았고, 주변 둑방 배수로도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다.


이씨는 논의 물이 영산강 수로를 통해 하굿둑까지 빠져나가길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답답한 심정을 드러내다.

그는 "저 물이라도 빠져야 부유물을 건져내고 수로를 다시 정비할 것 아니오?"라면서 "어차피 올해 벼 농사는 물 건너갔다"고 푸념했다.

이어 "짙은 녹색으로 가득차야 할 들녘이 황톳물이 넘실대는 바다가 됐다"며 "1989년 물난리가 크게 난 이후로 올해처럼 농사일이 막막한 적은 없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이씨는 "이대로 물이 빠진 뒤 벼가 자연스럽게 썩어 거름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고 토로한 뒤 농로에 나뒹구는 부유물을 치웠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건창(65)씨도 "벼가 아니라 수초 같잖소"라며 "4대강 사업 당시 죽산보를 짓고 소하천 제방을 쌓을 때 둑·제방의 규모 차이에 따른 한계 수위를 제대로 감안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논을 둘러싼 둑에 물길조차 막혀 있으니, 시간이 지나도 물 빠질 기미 조차없고 벼가 썩기만 하는 것이다"며 "폭우에 대비해 영산강 일대 둑·배수 시설을 하루빨리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폭우로 나주에서는 농경지 888.2㏊와 주택 43채, 축사 33개동(가축 7만3500마리 폐사)이 침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공감언론 뉴시스 wisdom21@newsis.com

 

[나주=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