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혼란기 ‘해방정국’에도 활발했던 군산의 야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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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혼란기 ‘해방정국’에도 활발했던 군산의 야구①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5.0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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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구장 1960년대)./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구장 1960년대)./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제26회 전국체육대회가 ‘자유해방경축전국종합경기대회’라는 이름으로 1945년 가을(10월 27일~31일)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된다.

군산에서는 축구 일반부 군산팀이 지역의 명예를 걸고 출전하여 유학생팀과 수원팀을 차례로 꺾었으나 준결승에서 경성구락부에 0-1로 석패한다.

농구 남자부 군산팀은 재영(載寧)팀에 21-37로 패하였다.

군산 야구팀(일반부)은 전라북도 대표로 출전, 예선에서 한영(韓映)팀을 18-8로 물리친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만난 대전팀에 4-10으로 대패, 3위를 차지한다.

정국은 이념갈등과 테러로 불안하였고, 인플레와 불황까지 겹쳐 총체적으로 위기였던 혼란기임에도 군산은 육상,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다양한 종목에 출전하여 시민의 체육 열기를 반영하였다.

당시 군산 야구팀 진용은 김수복(감독), 선수 이완동(주장), 최문보, 양태수, 이용준, 김수복, 김수연, 백판덕, 김수한, 한명수, 전익배, 서병철, 김태종, 임영권, 황용곤 등이었다.

그중 최문보 선수는 1950년대 실업야구대회에서 항상 상위권에 들었던 남선전기(한국전력 전신)팀 1루수로 맹활약하였다.

광복을 맞은 1945년이 조선체육회 부활을 신호로 체육계 재건을 시작하는 해였다면 1946년은 경기단체들이 정비되고 각종 체육행사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해였다.

육상을 필두로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주요 경기가 시즌 초부터 ‘제1회 대회’라는 명칭을 내걸고 개최됐으며 3·1절 경축대회, 8·15해방 1주년 기념대회 등이 열렸다.

한국에 진주하는 미군의 영향을 받아 야구 경기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또한, 올림픽 정신을 국내에 보급 발전시키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하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창설과 더불어 국제무대 진출 통로도 마련된다.

조선야구협회와 <자유신문사>가 공동 주최하는 제1회 전국도시대항 야구대회가 1946년 6월(7일~12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다.

이 대회는 해방 이후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야구대회 효시로 전국에서 11개 도시(경성, 부산, 인천, 군산, 전주, 마산, 광주, 대구, 대전, 개성, 춘천) 팀이 참가하였다.

전북에서는 군산과 전주팀이 출전했으나 두 팀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한다.

전주팀은 마산팀에 2-4, 군산팀은 준우승을 차지한 경성(서울)팀에 2-3으로 패한다.

열화와 같은 성인야구의 인기에 힘입어 개최된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1950~1953)으로 3년 동안 중단됐다가 1954년 <한국일보사>에 의해 부활하여 1959년까지 이어진 당대 최고 권위의 사회인 야구대회였다.

1946년 9월 15일 개최된 제1회 전국중등야구선수권대회 준준결승전(경기중-동산중) 경기를 경성방송 윤길구(尹吉九) 아나운서가 광복 후 최초로 라디오를 통해 중계방송을 해서 화제를 모았다.

또한, 9월 28일은 미군정청이 경성부를 경기도에서 분리해 서울특별시로 승격한 날이며, 경성운동장도 10월 1일부로 서울운동장으로 개칭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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