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야구계의 신사’ 김준환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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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야구계의 신사’ 김준환 ⑥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8.1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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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도청 앞에서 아버지(가운데)와 조철권 도지사(오른쪽)./사진=군산야구 100년사
전북 도청 앞에서 아버지(가운데)와 조철권 도지사(오른쪽)./사진=군산야구 100년사

 

"가장 가슴아픈 추억은 해태구단 버스 방화사건"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벌어진 영호남 대결은 숱한 명승부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나, 프로야구 전체를 뒤흔드는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김준환 감독은 프로선수시절 가장 가슴 아픈 추억으로 1986년 10월 22일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한국시리즈 3차전 경기가 끝난 직후 일어난 ‘해태구단 버스 방화사건’을 꼽는다.

삼성이 해태에 5-6으로 역전패 당하자 격분한 열성 팬들이 해태 선수들을 태우기 위해 세워둔 버스에 돌과 빈 병을 던지고, 기사가 피하자 차에 올라가 커튼을 뜯어내고 불을 지른 것.

버스 주변에 세워둔 승용차에 불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시위 진압 장비를 갖춘 경찰이 출동해 최루탄을 쏘아 흥분한 군중을 해산시키고 사태를 간신히 수습하였다.

아래는 김준환 감독이 전하는 그날의 현장 모습.

“경기 끝나고 소동이 일어나자 삼성 선수들은 운동장을 빠져나갔고, 우리(해태 선수들)는 경기장 관리실로 피해 무사했죠."

"밤 11시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 타고 숙소로 향했지만, 충격은 컸습니다.

"그 후 대구, 부산에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승패와 관계없이 경찰의 호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불편함은 물론 심리적인 부담도 많았어요.”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은 “내가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맞았던 최대위기였다”며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기자들과 심판원들은 대구경기 강행은 어려울 것 같으니 4차전은 서울로 올라가 열자고 제의했으나 이 전 총재대행이 장소를 바꾸거나 연기하면 나쁜 전례만 남기고 영호남 대립이 더욱 심화될 것 같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이튿날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과 대구 시민의 협조를 받아 4차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단다.

한국 프로야구는 출범 초부터 상대 팀 ‘타도 응원’, ‘텃세 응원’ 등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기승을 부렸다. 지방 경기장에서는 홈팀을 응원하는 관중들의 텃세가 심했다. 일부 관중은 작은 실수나 꼬투리만 잡혀도 극도로 흥분하여 운동장에 쓰레기와 빈 병을 던졌고, 선수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모두가 지나간 시대,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지옥과 천당 오갔던 1987년

1987년 11월 4일 자  '주간야구' 표지에 실린 김준환.
1987년 11월 4일 자 '주간야구' 표지에 실린 김준환.

 

‘공포의 KKK포(김봉연-김준환-김일권-김성한)’ 타선의 한 축이었던 김준환에게 1987년은 지옥과 천당을 넘나드는 해였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간호하면서 경기에 임하다 보니 정규리그 타율 2할 4푼으로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절치부심, 한국시리즈 3·4차전에서 잇따라 홈런을 날린 그는 기자단 투표에서 총 24표 가운데 23표의 압도적인 득표로 MVP에 오른다.

그해 한국시리즈(10월 21일~25일) 네 경기에서 무려 12타수 6안타(홈런 2개) 4타점의 눈부신 활약을 펼쳐 승용차를 MVP 부상으로 받았다.

한국시리즈 첫 파랑새존의 행운을 차지하였고, 매 게임 7번째 안타를 때린 선수에게 주어지는 ‘게토레이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였다. 또한, 각종 행운상 및 홈런상을 휩쓸다시피 해서 상금만도 2백만 원이 넘었다.

한국시리즈 4차전(해태-삼성) 경기가 열리는 1987년 10월 25일 광주구장.

삼성은 2회 초 이종두의 적시 2루타로 선제점을 올렸으나 2회 말 등장한 그 날의 히어로 김준환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2점 홈런을 터뜨리며 9-2 승리를 견인한다. 3차전에서도 역전 솔로 홈런을 날린 그는 해태가 한국시리즈 통산 세 번째이자 프로야구 첫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데 주역이 된다.

1989년 프로야구 정규리그 마감과 함께 프로야구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전북을 연고로 탄생한 쌍방울에 합류, 코치·감독을 거쳐 2003년부터 원광대 사령탑을 맡아오고 있는 김준환 감독.

그는 “군산상고 시절 말썽도 많이 부렸다”며 야구 인생에 큰 가르침을 준 고 최관수 감독을 떠올렸다.

 

둘이면서 하나였던 김봉연과 김준환

김준환(金準桓)은 전주 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 경기가 신기하게 보이고 좋아서였다.

홈런왕 김봉연과의 인연도 그때 시작됐다.

두 사람은 놀이도 운동연습도 따로 하는 법이 없을 정도로 붙어 다녔다. 그 후 전주북중에 다니던 김봉연은 야구부가 해체되자 군산남중으로 전학하여 야구수업을 쌓았고, 전주남중 선수였던 김준환은 1970년 군산상고에 입학한다.

중학교 때 헤어진 죽마고우가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난 것.

김봉연이 두 살 위였으나 두 사람은 후배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우정이 돈독하다. 그들은 처음 만날 때부터 둘이면서 하나였고, 하나이면서 둘이었다.

초등학교 때 야구를 함께 시작해서 군산상고, 육군야구단, 프로야구 해태의 중심타자로 활약하면서 둘도 없는 친구이자 경쟁의 상대였기 때문.

극동대 김봉연 전 교수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들어본다.

“준환이와 함께 전주시 어린이야구팀으로 선발되면서 사귀기 시작했죠."

"저는 어려서부터 까불까불 했습니다."

"그러나 준환이는 항상 묵묵하고 침착했어요. 시합은 물론 연습할 때도 말이 없고, 노는 것도 무게가 있었죠."

"지방에 내려가면 준환이는 꼭 만나고 올라오는데요. 안부도, 대화도 욕으로 시작합니다." (웃음)

"저희를 지켜본 후배들은 그 나이에 욕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형님들은 참 좋으시겠다면서 부러워하죠.”

1973년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육군야구단 시절에는 안타제조기로. 해태 타이거즈 선수일 때는 다섯 차례 우승을 일궈내는 주역으로, 1987년에는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준환 원광대 야구부 감독.

평소 말수가 적고 게임 매너와 외모가 뛰어난 그는 육순을 넘긴 지금도 ‘침묵의 사나이’, ‘야구계의 신사’ 등으로 불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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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2014년에 작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이와 직책 등이 지금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투데이 군산' 뉴스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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