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홈런왕’ 김봉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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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홈런왕’ 김봉연 ①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8.28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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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인터뷰하는 홈런왕 김봉연./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기자와 인터뷰하는 홈런왕 김봉연./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노~오피 솟은 볼, 날아갑니다, 날아갑니다. 아~ 넘어갔습니다. 홈런입니다!”

“김봉연 선수 대단해요! 힘이 장사예요···.”

1986년 여름 어느 날 프로야구 경기장.

해태타이거즈 김봉연 선수가 휘두른 배트 위쪽에 맞고 하늘로 솟은 공이 외야에 떨어지지 않고 긴 포물선을 그으며 펜스를 넘어가자 아나운서와 하일성 해설위원이 주고받은 대화의 한 토막이다.

당시 하 해설위원은 김봉연 선수가 헛스윙하고 헬멧이 벗겨지면 ‘힘이 장사’라는 말을 자주 했다. 배트를 얼마나 세게 휘둘렀으면 550g이나 되는 헬멧이 벗겨지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70~80년대 김봉연은 힘이 장사였다. ‘촌놈’, ‘탈모왕’ 등 그의 별명에서도 느껴진다.

불고기 11~12인분을 한자리에서 먹어 치우는 대식가인 그는 천부적으로 타격 소질까지 타고나 대학과 실업야구 시절 다양한 홈런왕 타이틀을 거머쥔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자 적진에 뛰어든 장수가 명검 휘두르듯 배트를 휘두르며 원년 홈런왕에 오른다.

원심력을 이용한 그의 스윙에는 볼이 정확히 맞지 않아도 수비 거리가 엄청나 외야수들이 애를 먹었으며, 배트 중심에 맞으면 거의 펜스를 넘어간다는 게 당시 야구전문가들의 평가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를 거쳐 해태 유니폼을 벗는 1988년까지 부동의 4번 타자였던 한국 야구의 진정한 레전드.

방망이 하나로 숨 막히는 긴장과 희열,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그의 기록은 ‘홈런왕’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프로야구 선수 출신 중 최초로 대학 전임교수가 됐다.

2001년 정들었던 야구계를 은퇴하고 충북 음성군 극동대학교 겸임교수로 시작, 현재 같은 대학 사회체육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인 김봉연 교수(아래 김봉연)를 만났다.

 

짜장면 실컷 먹고 싶어 시작한 야구

1960년대 전북초등학교 야구대회 모습./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1960년대 전북초등학교 야구대회 모습./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김봉연(金奉淵·62)은 전북 전주시 전동에서 11남매(7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다섯, 아래로 다섯, 형제가 많다 보니 끼니 때 누가 밥을 먹었는지 굶었는지, 추운 겨울에 누가 양말을 신고 나갔는지 맨발로 나갔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단다.

아버지 사업을 돕는 일꾼까지 합하면 항상 15명 안팎의 대식구.

그래도 안방, 건넌방, 사랑방 합해서 방이 여섯 개나 되는 집에서 복날이면 형제들 앞으로 삼계탕이 한 그릇씩 나란히 놓일 정도로 살림은 풍족했다.

 

“저는 10살이 돼서야 전주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두 살 위인 형이 야구를 했는데요. 기다렸다가 연습이 끝나면 함께 집으로 오곤 했죠."

"3학년 가을로 기억합니다. 하루는 교무실에 들어간 형이 안 나오기에 창문으로 슬쩍 봤더니 야구부 형들이랑 ‘짜장면’을 먹고 있는 거예요."

"순간 나도 야구를 하면 맛있는 짜장면을 자주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음날부터 연습장에 나가 공이 올 때마다 코치 선생님에게 던졌습니다."

"저를 알아 달라는 신호였는데, 다행히 테스트를 시켜 보더니 받아주더군요."

"4학년 때부터 투수로 활약했는데요. 연습 때마다 옥수수빵이 간식으로 나왔습니다."

"짜장면은 경기가 끝나면 학교에서 사줬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구수한 냄새와 맛에 매료되어 야구에도 흠뻑 빠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부잣집 아이들도 맘대로 짜장면을 사 먹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 받은 등번호 27번을 프로야구 때까지 고수했고, 1988년 은퇴하는 날까지 4번 타자만 했으니 짜장면과 보통 인연이 아니지요. (웃음)”

 

3연타석 홈런, 초등학교 5학년 때 첫 기록 세워

짜장면을 마음껏 먹고 싶어 시작한 야구.

그래서 그런지 김봉연에게 야구는 레크리에이션, 다양한 특별활동(클럽활동) 종목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야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나 버스를 타면 우승을 하겠다는 다짐에 앞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짜장면, 갈비탕 등을 먹는 게 더 좋았다.

그럼에도 경기가 시작되면 호투를 했고, 그라운드를 누비며 상대 팀을 제압했다. 홈런도 심심찮게 쳐냈다.

 

“5학년 때 개최된 전북 초등학교 야구대회에 전주시 대표로 선발돼서 3연타석 홈런 기록을 처음으로 세웠죠."

"전주 덕진야구장에서 열린 대회였는데요. 외야 펜스가 없던 시절에, 타자가 1, 2,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그라운드 홈런(장내 홈런)’이라고 했죠."

"영어로는 ‘인사이드 더 파크홈런(inside the park homerun)’이라고 하지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전주시 대표로 함께 뛰었던 김준환 원광대 감독은 인정합니다. (웃음)”

 

초등학교 때부터 알파벳과 ‘태정태세문단세···’를 줄줄이 외웠던 김봉연은 전북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았던 전주북중에 진학한다.

중학교 때는 축구, 핸드볼, 육상, 투포환 등 달리고, 뛰고, 던지는 시합이 열릴 때마다 선수로 뽑혀 출전했다.

모든 종목에 뛰어나다 보니 농구장에 가면 ‘너는 야구선수 아니냐’, 야구장에 가면 ‘너는 농구선수잖아’라며 동료들이 놀려댔다.

그래도 마음의 상처는 받지 않았다. 야구보다 공부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계속)

※ 등장인물의 나이와 소속은 2014년 기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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