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 ⑦-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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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 ⑦-끝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11.02 0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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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한국시리즈 우승패 치켜들고 기뻐하는 김성한 선수./사진 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86한국시리즈 우승패 치켜들고 기뻐하는 김성한 선수./사진 출처=군산 야구 100년사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83 한국시리즈’

김성한은 한국·일본 프로야구사상 처음 정예 선수끼리 맞붙은 한일슈퍼게임(1991)에서도 그의 진가를 발한다.

1-7, 큰 점수 차로 패색이 짙어가던 1차전 8회 초 이라부 히데키의 광속구를 통쾌한 좌월 홈런으로 받아쳐 한국 타선의 자존심을 살린다.

그의 파워는 특유의 오리궁둥이를 흔들면서 계속됐다. 네 게임에서 홈런 세 개를 터뜨린 것.

그가 사용했던 배트는 도쿄돔 지하에 있는 야구박물관에 보관됐다. 한국프로야구 선수로는 최초의 영예였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30여 년을 주전선수로 뛰면서 가장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경기는 제10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1976)과 1983년 MBC청룡-해태 코리언시리즈(한국시리즈), 그리고 프로야구 14년을 마감하는 1995년 광주구장에서의 은퇴경기였다고 술회한다.

세 경기 공통점은 자신이 승리의 주역이 아니었음에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는 것.

 

“대통령배 우승은 군산상고 2학년 때였죠."

"최관수 감독님과 선수들이 우승컵을 안고 암으로 투병 중인 원용학 교장 선생님 댁으로 문병을 다녀왔는데요, 그때 감격은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1983 한국시리즈 역시 해태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감돌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제가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도 아닌데···."

"그 후 3년 연속 해태가 우승하고, MVP를 수상했을 때도 기쁘기만 했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어요."

"은퇴 경기도 범타로 물러나 아쉬움을 남긴 경기였죠. 그럼에도 팬들의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김성한은 은퇴경기를 치른 그해(1995) 12월 친정팀 해태 2군 타격코치로 데뷔,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97년 봄 해태 1군 타격코치와 수석코치를 거쳐 KIA 타이거즈 3대 감독(2001-2004)을 역임한다.

그는 2002년 2군 포수였던 김지영을 폭행한 사건으로 감독생활에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다.

2004년에는 모교인 군산상고 감독을 맡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MBC 프로야구 해설위원과 강사로 활동하다가 2012년 가을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래는 그의 소회.

 

“빈손으로 시작한 제가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분에게 과분한 사랑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타격코치로 시작한 지도자 생활도 열심히 한다고 했지요. 그럼에도 투지만 앞세워 뛰어난 용장(勇將)이 되려다가 남긴 오점(폭행사건)은 오욕의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야구) 일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죠."

"이제는 시대도 변했고 지도자상도 바뀌었으니, 원활한 소통과 포용력으로 존경받는 덕장(德將)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도쿄돔 담장을 넘기는 홈런 세 방으로 한국 야구를 깔보던 일본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팬들에게 희열을 느끼게 했던 사나이.

국내외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포효하던 그도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었는지, 큰아들(31) 결혼날짜를 잡아놓은 예비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 경험과 견문이 넓은 원로에게서 느껴지는 유연함과 노숙함이 묻어났다.

(김성한 편 끝)

※ 등장인물 나이와 소속은 2013년 10월 기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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