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20] “80여 년 전 영동에 백화점이 있었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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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20] “80여 년 전 영동에 백화점이 있었다”(하)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5.1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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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백화점 경쟁 치열… 미나카이, 초지야, 동아백화점 등 상륙
일제 잔재 속에 핀 언론민주화운동 거두 인연… 해방정국 이후 거목들 인연
모자점 갑자옥과 고(故) 리영희 한양대 교수… 군산에서 윤영자여사 만나
독재시절 언론자유운동에 힘써온 임재경 전 한겨레부사장도 군산고 졸업

 

1930년대 영동거리 모습
1930년대 영동거리 모습

 

1930년대에도 군산에 백화점이 있었다.

군산의 번화가였던 중앙로 1가(명치통)에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이 들어선 이후 초지야(丁子屋)백화점, 동아백화점 등이 진출해 영업을 했단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현 군산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군산지역 최고의 백화점이었다.

미나카이 백화점이 서울에 문을 연 것은 1932년이었고 지방에도 분점을 설립하는데 군산에 그 분점이 생긴 때는 1930년대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미나카이 백화점 외에도 군산에는 당시 송방골목(영동상가) 안에 최근까지 영업을 했던 동아백화점과 초지야백화점 등 2곳이 진출했었다.

초지야 백화점은 옛 군산경찰서에서 송방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좌측에 있었고 일본인이 운영했다.

하지만 영동상가의 산증인 강유식 사장의 선친인 강흥술(작고) 사장이 나중에 초지야 백화점을 해방 직전까지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동아백화점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아 내용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백화점 시대 개막… 서울과 군산, 일본인 대자본 진출

한말에 이르러 조선의 경제 진출 주도권을 잡아왔던 삼정(三井)재벌은 그 직영백화점인 삼월(三越)의 지점을 1906년 서울에 설립했다. 위치는 충무로1가 현재 사보이호텔 건너편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것이다. 이어 1927년에는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일제강점기 백화점의 총수의 지위를 누렸단다.

소림양복점을 경영해오던 고바야시(小林門中)가 1921년 4월 현대식 백화점인 초지야를 설립했다.

기모노점을 경영하던 일본인 나카에는 1922년 충무로1가 미나카이백화점을 설립했고 1932년 현대식의 대형점포를 신축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미나카이백화점은 군산을 비롯한 부산, 대구, 평양, 목포 등에 지점을 설립했다.

말하자면 백화점 경영을 전국적인 규모로 연쇄점을 운영하는 새로운 경영방식을 도입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인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일본계 소매상 및 종합상사들이 서울을 발판으로 활동했고, 국내 상업을 잠식해갔다.

이 당시 일본인에 의한 백화점 중 미나카이와 초지야 백화점이 군산에 진출, 영업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영업망과 유통망을 매우 많이 잠식했다.

한국인의 백화점 경영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종로상인들이 백화점 경영의 길을 개척했다.

1916년 종로상인 김윤배가 종로2가에 김윤 백화점을 설립했지만 백화점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는 했으나 도자기류와 철물류를 다루는 잡화점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금이 적어 경영규모를 현대식백화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백화점 경영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유재선의 계림상회와 이돈의의 고려양행 등도 백화점 경영방식의 모형을 갖췄다.

이처럼 종로2가 주변이 영세한 규모이기는 하지만 백화점 거리로 그 모습이 바뀌어가면서 종로상인의 경영방식이 점차로 근대화의 길을 개척하여 가는 경로를 보여줬다.

남대문로 1가도 현대식 백화점에 가까운 화양잡화점 등이 들어서면서 종로2가에 맞서는 백화점거리로 부상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평안도 용강에서 인쇄소를 하다가 서울로 상경한 박흥식은 종로2가에서 금은방 영업을 하던 화신상회를 인수, 1931년 확장해나갔다.

당시 문을 열었던 주식회사 화신상회는 비록 그 규모가 작고 상품구성에 취약했지만 한국인의 손에 의해 개설된 우리나라 백화점의 효시라는데 의의가 있다.

한때 화신의 인접지에 한국인 최남에 의해 1932년 1월 동아백화점이 설립됐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1930~40년대 군산의 영동상가의 사진에 동아백화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백화점 중 토착화에 성공한 분점 또는 지점이 아니었나 싶다.

화신상회는 1934년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는 비운을 맞이했으나 그 이듬해에 박길룡의 설계와 시미즈 구미의 시공에 의해 현대식 건물을 신축, 명칭도 ‘화신’으로 바꿨다.

지하 1층 지상6층의 근대 르네상스 양식을 취한 건물이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하에 싹을 틔운 국내 백화점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이라는 급격한 혼란기를 겪으면서 쇠퇴했다가 1960년대에 근대화과정의 한 부분으로 흡수돼 재편성,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자점 갑자옥과 리영희(한양대 교수) 선생… 군산에 왠 한국해양대?

갑자옥 모자점은 한때 목포와 군산 등 국내는 물론 멀리 만주까지 지점(체인점)을 냈을 정도로 대단한 모자점이었다 한다.

군산의 갑자옥은 옛 경찰서 부지 앞 오거리의 영동입구에 있었던 루디아 옷&꽃과 이웃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그 주변에 ‘하나야 인력거 방’이 있었다.

그 당시 군산에서 갑자옥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가게였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트렌드가 변하면서 1970년대 초반 군산의 갑자옥은 아쉽게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아들이 뒤를 이어 운영하다 다른 사업으로 전업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갑자옥 모자점과 고 리영희 선생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재미난 얘기가 있어 그 배경과 저간의 에피소드를 다뤄본다.

얼마 전 작고한 전북 언론의 산증인인 김병남 전 서해방송보도국장은 오래 전부터 “언론인이자 교수였던 고 리영희(1929~ 2010년 12월) 선생이 갑자옥의 사위였다”고 회고했었다.

당시에는 극히 소수만 아는 얘기였다.

이에 포탈 등에서 자료 찾기에 나선 결과, 고 리영희 선생의 평생동지이자 반려자였던 윤영자(1932~ ) 여사는 2012년 8월 한국기자협회와의 인터뷰에서 “군산 갑자옥 모자점의 큰딸이자 군산이 실질적인 고향”이라는 증언을 한데 따른 것이다.

윤 여사의 친정은 본래 제주도가 고향이었지만 (윤 여사가)어려서 군산으로 이사와 군산여고를 졸업했고 리영희 선생과는 한국해양대에 다니던 시절에 만났다는 것이다.

윤 여사의 집안은 본래 할아버지가 제주도 모슬포에서 한의학을 하셨고 ‘윤약국(윤한의원)’을 운영, 그 지역에서 잘 알려진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윤 여사의 아버지(고 윤평숙 사장)가 가게를 연 것이  ‘갑자옥 모자점’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표현은 친정 쪽이 일본에서 모자 제조기술을 배워 와서 목포, 군산, 익산, 대전, 청주 등 국내외에 갑자옥 모자점이란 체인점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포 갑자옥 모자점과의 관계가 불분명한 만큼 이에 대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지금도 영업 중인 전남 목포시 영해동2가 있는 갑자옥 모자점(개업 1927년)은 올해로 94년째를 맞고 있다. 갑자옥은 갑자년인 1924년 문을 열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져 있다.

군산과 목포, 대전 등지에 있었던 갑자옥의 개업 시작이 비슷했다는 언론보도와 자료들을 보면 상호 간의 유기적인 관계, 즉 친인척들의 동업 및 협업체적인 관계가 아니었나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목포의 경우 현재의 사장 이태훈씨가 모친 문금희(1999년 작고)여사로 부터 물려받았지만 그 전에는 이씨의 외종숙(어머니의 사촌오빠)이 운영하던 것을 해방 직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이씨 집안과 어머니 문씨는 본래 제주도 사람이었단다.

군산 갑자옥 모자점의 뿌리는 뭘까.

목포의 갑자옥 모자점의 주인도 고향이 제주도이고, 윤영자 여사의 집안도 제주도 모슬포라는 점에서 볼 때 제주도의 같은 지역(또는 인근 마을)에 살았던 친인척(?)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윤 여사의 아버지는 생존 때 90세가 넘도록 장수했단다. 큰 남동생 영철씨는 캐나다로 이민했고, 둘째 남동생 영식 전 사장은 군산에서 거주하면서 갑자옥과 메이커 대리점 등을 운영하기도 했단다.

그러면 윤영자 여사와 리영희 선생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인천에 있던 한국해양대가 군산으로 갑작스럽게 옮겨오면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리영희 선생이 해양대 재학 중에 윤 여사의 친구 언니의 집에서 하숙한 것이 인연이었다. 윤 여사가 그 집에 놀러가 만난 것이 군에 입대한 후에도 계속돼 결혼으로 이어진 것이다.

연애시절에는 군산의 월명공원(당시 군산공원 명칭 사용)과 인근 다방 등에서 데이트를 하며 사랑을 키웠단다.

 

한국해양대의 이전 비화…군산이주와 부산 이전

한국해양대는 1947년 1월 진해해양대학(전신 진해고등해원양성소1919년 설립)과 인천해양대학과 통합한 뒤 국립해양대학으로 승격(인천 이전)됐고, 그해 5월 군산으로 이전했다.

해양대의 군산 시절은 1947년 5월부터 1953년 10월까지 부산으로 이전할 때까지 6여 년 동안 계속된다.

이곳으로 이전한 것은 이시형 초대 한국해양대학 학장이 인천지역의 캠퍼스문제에 비협조했기 때문에 새로운 대안을 적극 검토한 것이다.

이 대학의 기관과 졸업생(2기)인 김주년에게 친서를 줘 당시 박봉섭 군산시장과 김판술 의원 등을 만나 이 같은 결과를 냈다.

김주년은 익산~ 군산을 오가는 통학열차에서 자신의 선배 강우득 군산초교장과 만나 이 같은 이시형 학장의 의지를 전달해 대대적인 한국해양대학 유치의 서막이 올라간 것이란 게 군산시청 동장이었던 ‘최영 시인’의 풍물기 내용이다.

이런 비화 속에 군산과 연을 맺은 한국해양대는 결과적으로 정거장에 불과했다.

군산시민과 정치가 등의 열정으로 유치한 한국해양대가 전쟁 속에 어이없이 부산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이 대학이야말로 해방정국이 군산에 기회를 줬다면 한국전쟁은 부산의 편이었다.

초대 학장 해당 이시형의 회고 내용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던 이 대학의 앞날을 암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쟁 속 군산의 캠퍼스는 폭격으로 전소됐고 부산 피난 속에 선박과 천막이라는 임시 교사(校舍) 생활이란 고난 연속이었다.

이 상황은 이 대학에게는 일종의 여명기였는데 전쟁 직후에 UNKRA(국제연합 한국재건단)과 정부예산 등으로 부산캠퍼스시대를 활짝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지역 원로들은  ‘해대 건물이 있었던 곳’이라 불린다.

이런 해방정국과 한국전쟁기에 한국해양대 학생이었던 리영희 선생과 그의 부인 윤 여사가 만나 연애했고 전쟁이 끝나면서 결혼(1956년 11월)에 골인했다.

 

고 리영희 선생은 누구인가… 르몽드 ‘사상의 은사’란 칭송

/출처=언론인 리영희(1929~2010) 창비
/출처=언론인 리영희(1929~2010) 창비

우리 시대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이자 큰 언론인이었다.

그의 평생은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싸움의 역정이었다.

근무하던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 번씩 해직됐고,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됐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이른바 김대중 과도내각 사건) 중 한명으로 그를 지목․ 투옥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리영희 선생을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

군을 제대한 그는 57년 합동통신 외신부기자로 언론인의 삶을 시작했고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현장을 누볐다.

베트남 전쟁 파병 비판기사를 썼다가 조선일보에 쫓겨났고 군부독재 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다가 합동통신에서 해직됐다.

한양대 교수로 재직하던 76년과 80년에도 각각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의 압력으로 두 차례에 걸쳐 교수직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그는 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이사 및 논설고문을 맡았고 방북 취재를 기획했던 8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그의 무기는 관념이 아닌 사실이었고, 이론이 아닌 실천이었다.

그는 글쓰기를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정의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그는 오직 진실과 균형의 날개로 이념적 도그마에 저항했다.

그의 저서는 반공이념으로 갇힌 이들에게 새로운 사상의 통로이자 다른 길로 안내했다.

그 당시 필자는 물론 많은 젊은층들이 그 책들을 읽고 새로운 사상의 자양분을 얻어내 오늘의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지는데 역할을 했다.

심지어 고 노무현 대통령도 각종 시국사건을 변호하기에 앞서 관련 책들을 독파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와 ‘우상과 이성’(1977년) 등은 반공이데올로기가 가린 베트남 전쟁의 실체와 중국의 현실을 직파한 사회과학서적이어서 당대의 대표적 금서로 탄압받았다. 중국과 관련된 책자에 대해 친마오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다.

한편 군산과 인연이 있는 원론 언론인을 개략적으로 소개해야 될 것 같다.

고 리영희 선생과 함께 동시대 한국언론민주운동에 앞장서 온 임재경(1936~ )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에 대한 얘기다.

왜 뜬금없이 임 부사장이냐는 묻는 이가 있을 것이다. 군산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그는 강원도 김화가 고향이지만 한국전쟁 때 서울 등을 거쳐 1951년 군산으로 피란, 영화동의 어느 집에서 살았단다. 전쟁 중이어서 비인가 광동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고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문제를 돌파한 분은 그의 모친(일본 고베유학파). 어머니는 그 학교장을 설득, 학력 수준을 보고 입학을 허가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받아줬다는 일화다. 그 학교가 서해안권의 최고 명문 중 하나인 군산고였다.

그는 최지신 전 수협조합장과 고 김병남 전 서해방송 보도국장 등과 고교 동기다.

군산고 재학 때 평생 은사였던 차재철(서울대 철학과) 독일어 교사와 만나 서양문학과 철학을 관심을 갖고 공부에 정진, 서울대 문리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등에서 민주언론운동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온 참언론이었다.

그는 리영희 선생과 송건호(1927~ 2001년) 전 한겨레신문 사장과 교류했을 뿐 아니라 창작과 비평 대표의 백낙청(1938~ )교수, 이종찬(1936~ ) 전 국정원장, 남재희(1934~ ) 전노동부장관 등과 동시에 활동했던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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