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24] 각양각색의 우체통이 거리를 수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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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24] 각양각색의 우체통이 거리를 수 놓다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6.1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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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년 역사 ‘군산우체통거리 조성사업’… 주민주도적인 지역가꾸기 사례
금융기관, 호텔, 경찰서, 우체국, 통신시설(전화국: KT) 등 밀접한 준행정타운
중정길+거석길 (우체국 주변, 개복동 성매매 화재참사 현장, 구 경찰서 부지 등)
(자료사진)우체통 거리/사진=군산시
(자료사진)우체통 거리/사진=군산시

 

월명동과 영동, 중앙동 등지에서 발걸음을 옮기면 군산의 문화예술중심지가 나타난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삼성생명과 교보생명 등이 들어선 중심지로 부상한 곳이 중정길이다. 이곳은 금융기관, 호텔, 경찰서, 우체국, 통신시설(전화국: KT) 등이 밀접한 준행정타운으로 그 당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었다.

삼성생명의 뒷골목은 곱창단지로 한때 각광을 받았지만 원도심의 쇠락 등으로 지금은 인적이 뚝 끊긴 한적한 공간이 된 지 오래다.

동인전자 가게와 기아대책본부 사무실, 이미영 미용실, 공방 꽃향기 등을 거치면 교보생명 뒷길 주변의 군산우체국과 스위트 인디아 군산점 등이 있다.

과거에는 인근의 옛 빅토리아 호텔과 동원예식장, 대한항공 군산지점 등이 영업(또는 입점)을 했던 곳이어서 밤이면 불야성을 이뤘고 낮에도 인적이 끊이질 않았다.

오늘처럼 교보생명이 들어서기 전에는 대학로를 낀 대로변에 변호사 사무실들이 즐비했다는 게 주민들과 오랜 법조관계자들의 얘기다.

군산우체국의 시작은 대한제국에서 파견된 옥구감리서의 우체국과 조계지 내의 일본 우편국 군산출장소로 이원화돼 있었다. 군산우편국은 1905년 전신업무를 시작, 일본영사관의 바로 앞에 일본 우편국을 신축, 이전했는데 지금은 사라진 영화동의 우편국.

이 우편국은 해방 후 화재로 당시 대한청년단 사무실로 쓰이던 중앙로 1가의 미나까이 백화점 자리로 옮겨왔는데 이곳이 현재의 군산우체국이며 그 자리에 새청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보통 우체국 골목길로 통하지만 새주소에는 ‘거석길’로 되어 있다.

이곳이 새롭게 변신, 이제는 우체통거리로 불리고 있다.

이 골목길의 오래되고 인기 있는 사랑방은 스위트 인디아 군산점.

이곳의 강희순 사장은 2014년 5월, 기존의 커피점(케냐)을 접었다. 우연한 여행 중 인도 음식을 접하고 빨려들었단다.

대대적인 변신을 통해 인도음식을 만들어 집을 떠나온 인도사람들과 새로운 맛을 갈구해온 이들에게 맛으로 승부하고 있다.

물론 서빙에서부터 음식을 만드는 일에 인도 현지인들이 주도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오랫동안 커피점을 운영해온 오을연‧ 강희순 사장 부부는 지역민들에게 오리지널 인도음식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이런 이색음식은 곧 식도락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수년 전 군산시간여행축제 때 만찬 장소로 이용될 정도였다.

이곳의 대표 음식은 인도식 숯가마인 탄두리에서 구워지는 인도인들의 주식 ‘난’과 탄두리 치킨이다. 그중에서도 마늘을 섞어 만든 갈릭 난은 인기 음식 중 하나다. 양고기 커리와 새우 커리, 야채볶음밥 등도 이미 대중들의 맛을 사로잡고 있다.

또 이곳에서는 인도 요리사가 직접 정통요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퓨전 인도요리와 한국식 인도요리도 경험할 수 있다. 여성을 위한 파스타, 리조또, 신세대들의 맛을 겨냥한 핫떡볶이, 크림 떡볶이 등도 맛을 본 사람들은 잊지 못해 단골을 자청할 정도다.

이 요리들의 맛을 처음 보는 고객들을 위해 강희순 사장은 특유의 친절함과 우아한 시연을 통해 인도음식의 마니아로 이끌고 있다.

이 블록에서 20~30m만 극장가 골목방향으로 내려가면 옛 서해대 생활관(옛 빅토리아 호텔)을 거쳐 옛 경찰서 부지와 인접한 옛 통신시설(전화국: KT)에 다다른다.

근대적 의미인 군산경찰서의 출발은 이원체제였다.

대한제국은 경무서라고 했고, 일본은 경찰서라 불렀다. 물론 처음부터 이곳에 경찰서가 들어선 것은 아니었고 개항장인 군산의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사무를 집행하게 된 곳은 옥구 감리서의 경무서였지만 거류지회에서 운영하는 경찰조직은 별도로 운영됐다.

영사관 시절 일본경찰서는 영사관 내에 있었으나 영사관이 이사청(통감부)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통합된다. 일본은 1908년 국권을 사실상 빼앗아 대한제국의 경무서를 병합한 후에는 우편국에서 멀지 않은 영화동 여성회관 인근에 경찰서 단독 건물을 건립, 이전한다.

하지만 군산의 일본인 경찰서는 이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1910년 합방과 함께 군산의 중심도로인 중앙로1가가 끝나는 구 경찰서 자리로 신축, 이전한다.

당시에는 군산에는 군산경찰서와 순찰 주재소 8곳이 운영됐고 시설 노후 문제 등을 이유로 1993년 9월 경암동 현 청사로 옮겼다.

아마도 이곳은 조정래 아리랑 속에 나온 민초들의 억압과 고통의 공간이었으리라.

남은 부지는 공공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고 인근에 개복파출소와 옛 KT군산지점 건물 등이 있다.

경찰서 뒷편에는 1952년 7월 설립한 군산성광교회(담임목사 차상영)와 개복동 성매매업소 화재참사현장 등이 있다. 성광교회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지역 내 기독교장로회(기장)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교회 중 하나.

한때 이 건물과 거의 붙어있었지만 지금은 개복동 극장가 교복판매업소 단지로 이전한 ‘신흥모자’는 군산 최고의 모자점.

이 가게는 고 송규헌옹이 1947년 3월경 창업한 곳으로 현재 송씨의 딸 재희씨가 운영,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한때 군산 최고의 번화가… 우체통거리 1길과 2길의 재탄생

쇠락하는 원도심의 한 거리가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새롭게 피어났다.

이야기의 중심공간은 군산 우체통거리(1길과 2길).

이곳은 본래 이름은 개복동과 신창동을 잇는 거석길과 중정길이 교차하는 곳이었지만 한때 범군산행정타운의 중심권에 있었던 북적북적한 거리였다.

최소 약 100년 동안은 엄청난 영예를 누렸다. 군산우체국은 물론 시청과 경찰서, 법조타운 등이 인접한 곳이었을 뿐 아니라 극장가까지 즐비해서 중소도시에서 보기 드물게 옛 빅토리아호텔 등이 들어설 정도였다.

그 영광은 딱 여기까지였다. 이곳은 90년대 후반 조촌동으로 행정타운의 대이동(?) 이후 한적한 동네이자 조용한 거리로 변했다. 이 여파로 많은 음식점들과 가게 등이 이곳에서 하나둘씩 떠나갔고 극장들까지 문을 닫으면서 밤이면 칠흑과 같은 곳이 됐다. 주변상권의 위축은 심각, 그 자체였다.

한때 서광(瑞光)이 비추는 듯했다.

2014년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선정되면서 기대감이 피어올랐지만 밋밋한 흐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지역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우리 동네를 스스로 가꾸고 개발하자는 자발적 의지를 살려 2015년 ‘도란도란공동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지역주민이 사업을 기획하고 예산확보, 사업추진, 그 결과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주민주도 도시재생사업의 불씨가 모락모락 살아난 것.

가장 시급한 것은 예산이었는데 이를 주민들이 처음부터 자체 회비로 충당하며, 재생사업의 모우멘텀을 살리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냈다.

이 과정에 만들어진 참신한 아이디어가 군산우체국 본점 50여 년 역사와 110여 년 군산우체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 스토리텔링한 ‘군산우체통거리 조성사업’이었다.

주민들이 회원이자 행동주체로 나서면서 서울과 인천, 남원 등 전국을 돌면서 총 40여 개의 폐우체통을 직접 수거했고 지역문화단체 ‘미술공감 채움’의 도움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 첫 시도 중 하나가 작품 ‘우체부 아저씨’ 조형물이었다.

그 중심지역이 거석길과 중정길 약 150m의 거리 양쪽으로 각양각색의 우체통들이 들어서게 된 것. 세계 각국의 우체통까지 선보이고 있다.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민들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은 2017년 거리활성화를 위해 ‘군산우체통거리 경관협정운영회’를 조직, 적극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어 군산시와 경관협정을 체결했을 뿐 아니라 전북지방우정청과 우체통거리를 활용한 문화관광 홍보 콘텐츠를 만들자는 협약까지 맺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반적인 ‘경관협정’이란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지역 경관을 관리하자는 제도인데 운영 주체는 지역주민이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건축물, 광고물, 공작물, 외부공간 등과 관련한 주민들 간 약속이자 다짐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자체 교육과 토론을 통해 주민 단합과 역량 강화에 힘을 쏟는 한편 주변 거리 미관을 살리기 위해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면 빗자루를 들고 거리 청소에 나서고 있다.

또 수시로 만나 서로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하려는 마을공동체를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전국적으로 주민주도사업으로 이뤄진 도시재생사업은 적지 않다. 여기저기에서 유사한 사업들을 전개하는 것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주민들이 기획하고 주도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도시재생사업의 첫 사례는 군산은 물론 전국에서도 아마 군산우체통거리가 으뜸일 것이다.

이 거리의 변화는 경관협정 체결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다.

의존적인 기존 사업과 달리 시가 상가 주변 주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감동, 이곳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단초는 이렇다.

오고 가는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신호등이 설치됐는가 하면 오랫동안 방치된 폐가가 정리되기도 했다. 또한,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통해 벤치와 태양광 가로등의 설치를 비롯해 홍보책자와 엽서 등에 이르기까지 지원과 협력 사업은 지속되고 있다.

사거리 주차장 담장에 우체통거리에 포토존 ‘손편지 만나는 곳’을 마련했고 거리명(名)도 기존의 거석길과 중정길이란 이름에서 ‘우체통거리 1길’과 ‘우체통거리 2길’로 변경했을 정도다.

우체통거리 도시재생사업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손편지 축제’다.

손편지 축제는 2018년 추억을 만들자는 주제로 열렸는데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특히 우체통의 의미를 잃고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는 추억의 편지쓰기 열풍을 만들어냈고 외국인 유학생 등에게 고국과 가족들의 사랑을 연결하는 큰 촉매제 역할을 했단다.

실제로 군산에 유학 온 베트남 한 여학생의 사모곡을 담은 편지는 베트남 현지 언론에 소개돼 대서특필됐을 정도였다.

이런 반향은 1년 후인 2019년 8월 말 손편지 축제에 그대로 투영됐다. 2500 여명이 다녀갔을 뿐 아니라 김현미 장관 일행의 내방으로까지 이어질 정도로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2020년 손편지 축제(8월 7~ 8일)는 코로나 19사태 속에 치러지는 행사여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보다는 부모와 자녀들의 추억만들기 축제로 컨셉을 잡고 향후 더 발전된 행사를 기약하고 추진하고 있다.

작년 축제기간 동안 가장 눈길을 끄는 행사는 ‘군산우체통거리 (주민자치) 홍보관’ 개관이었다.

이 홍보관은 한 주민이 건물을 무상기증한 것이어서 전국적인 사례에서도 매우 드문 경우여서 주민들은 물론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고 있다.

이런 주민들의 열정이 결실을 맺으면서 그동안 공실로 남아 있던 가게들이 대부분 채워지면서 주변 상권도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과거와 같은 핫한 상권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

우체통거리의 성공 원인은 주민들의 헌신과 군산우체통거리 경관협정 운영회(운영회장 배학서) 간부들의 적극적인 노력 덕분. 여기에다 주민들의 노력을 관심 있게 지켜본 군산시(도시재생과)의 협력도 큰몫을 했다 하겠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군산우체통거리는 ‘국토교통부 2020 도시재생사업 30선’에 선정됐을 뿐 아니라 ‘2020 전라북도 지역특화형 마을축제’로 지정되는 등의 기염을 토하고 있다.

 

개복동 성매매업소 화재 참사… 당시 화재 취재 후기

2002년 1월 하순 발생한 개복동 유흥업소 화재참사 현장. / 사진= 투데이군산
2002년 1월 하순 발생한 개복동 유흥업소 화재참사 현장. / 사진= 투데이군산

 

‘2002년 1월29일 개복동 A유흥주점에서 일어난 불로 이곳에서 근무하던 20대 여종업원 14명이 숨졌다. 앞서 2000년 9월19일 대명동 성매매업소에서도 여성 5명이 화재로 희생됐다. ’

이들 사건이 군산에서 연이어 발생하자 매스컴 보도는 물론 지역여성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적극 나서 사회적인 의제로 삼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영향으로 오늘의 성매매방지법이 탄생한 것이다.

올해로 개복동 성매매업소 화재참사 19돌.

앞서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등 모두 30여 단체는 2013년 4월 군산개복동 여성인권센터 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여성들의 희생을 형상화할 수 있는 조형물 설치를 계획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지만 추모벽 외에는 아직 별다른 변화는 없다.

다만 시는 오랫동안 흉물스럽게 방치했던 개복동의 2층짜리 참사현장을 철거하고 시 소유의 땅에 미니 잔디광장을 만들었다.

화재 당시 대가․ 아방궁 유흥주점이었던 이 건물은 전기합선으로 불이나 여종합원 14명과 남자 지배인 1명 등 모두 15명이 숨졌다.

사회적 파장이 컸던 것은 인원도 인원이지만 감금상태에서 질식사했었고 취업(노예)각서 등에 반인권적인 행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나기 전에는 이 여성들의 단체행동 진풍경들이 목욕탕이나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됐었다.

필자는 당시 화재 참사의 생생한 목격자였다.

이곳 참사에 대한 기억은 과거 대명동 직업여성피해사건 때문에 생생하고 체계적인 취재를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언론인 선배가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점심을 초청, 막 식사를 하려는 시간에 불길이 일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가보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고 처참한 광경이었다. 이곳의 희생자들의 시신들이 구급대 등에 실려 병원으로 줄줄이 실려 가는 상황을 지켜봤다. 식사 직전, 이곳을 한 방송기자 후배가 알려줬는데 이를 듣고 가장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생생한 장면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 한국기자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단다.

처음에는 이곳의 화재가 단순 화재라는 경찰 및 소방 관계자들이 발표했지만 후배 P와 의견을 교환하고 현장을 둘러본 결과 발표와 달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건물은 1층과 2층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사망자들이 전원 1층에서 숨져 있는 점으로 미뤄 감금 가능성을 제기한 것은 우리가 유일했다.

그런 연유는 특수키(?)로 인해 밖에서 잠금장치를 가동할 경우 나갈 수 없는 구조였다고 지적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참사로 이어졌던 것. 취재 중에 이곳에서 한 피해여성의 안타까운 일기장을 발견, 당시에 다니던 회사 신문에 내용을 담기도 했다. 후배는 이곳에서 나온 해수욕장에 다녀온 사진을 찾아 보도하기도 했다.

그 후 이곳에서 운영하며 돈을 벌던 L씨의 소유 아방궁 저택 얘기와 그 후 인생 관련 소문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이곳의 여성들의 안타까운 가족사 등을 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곳의 문제점을 막기 위한 노력들도 했었다. 그 당시 함께 취재했던 후배와 그 시절을 얘기하면서 열띤 현장 취재 에피소드를 추억물로 떠올리곤 한다.

이 때 수사과장으로 막 부임한 K씨는 수사능력을 발휘, 총경- 경무관- 치안감 등으로 승진해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당시 근무하던 다른 간부들은 대부분 퇴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현장은 대부분 사라져 추억과 애도의 공간으로 변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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