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25] 개복동 한 시대 풍미 문인들의 활동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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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25] 개복동 한 시대 풍미 문인들의 활동 무대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06.2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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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기 예술인 천국 …고은 선생‧ 나병재‧ 홍건직 등 토요동인회 발족
문화예술의 열기 가득… 가람 이병기‧ 신석정‧ 참여시 거장 김수영 등도 교류
운보 김기창‧ 그 부인 박래현의 향기도 여전… 운보의 피난살이 ‘예술혼 재충전’
옛 '비둘기 다방' 자리
옛 '비둘기 다방' 자리

 

- 미스 박-

비둘기다방 아가씨 미스 박

하연 얼굴 쟁반이었다

경상도에서 온 미스 박

불친절하다

시건방지다 하고

껄렁패 손님한테 따귀 맞고

한 5분 동안 안으로 들어가 울고

화장 고치고 나와

아무 일 없었던 듯

새 손님 탁자에 엽차 놓고 재떨이 놓고섰다

하룻밤 자고 난 낮은 목소리

뭐 드실랍니꺼? 묻지도 않는다 -< 고은 만인보 7, 8, 9>

 

중정길 또는 우체통거리에서 몇 발짝을 떼면 극장길이다.

한때 군산은 물론 전북을 대표하는 극장가와 그 주변 상권의 활력이 넘쳤던 공간이었다. 극장과 관객, 상가들의 만남은 너무도 환상의 콤비였다.

이런 공간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화가 등 문화예술인 등이었을 것이다.

군산의 극장가는 다방 등을 통한 문학예술활동의 주무대였단다.

구한말에 이르러 개화바람을 타고 우리나라에 커피가 상륙하면서 상류층과 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바람을 넘어 엄청난 붐으로 일어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다방문화가 전국으로 확산, 군산지역 인텔리겐치아들의 사교의 장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일본인들이 군산에 다방문화를 유입시킨 시기는 확실치 않는다.

하지만 극장가가 전북 최초로 들어선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일인(日人)들에 의한 다방의 탄생은 1920년대 후반 이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시작한 다방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없었지만 군산지역에서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다방이 만들어진 시기는 아마도 1930년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군산 최초의 다방은 지역원로들의 기억에 따르면 고향다방이었지만 1940년대에서 해방 이후 군산의 다방들은 전북 유명 문학 및 예술인들의 집합소였고 교류의 장이었다.

다만 해방 직후 1950년대까지 지역에서 유명세를 탄 다방들은 극장가에 있던 비둘기다방과 이성당과 대창약국 사이에 있었던 전원다방(지금은 형태가 사라진 공간)과 양지다방, 아카데미다방 등이었다.

또 상공회의소 지하에 있던 김다방, 장미동에 돌다방, 제일다방, 군산우체국 옆 아담다방 등도 그런 류의 풍류를 담아냈던 곳이었단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기의 군산 영화동 주변은 상업용 그림을 그리는 전업작가들이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그렸던 작품들이 다방가에 내걸렸고 일부는 다방 여주인들이 일종의 큐레이터 역할을 하면서 작품관리와 소개도 하고 평가도 했단다.

그래서 이런 연유로 그 당시 군산 등 호남권에는 풍부한 작품들이 나돌면서 다방과 이발소 등에까지 내걸려 있었을 정도다.

주인은 몇 차례에 걸쳐 바뀌었지만 약 60년 동안 이름을 유지하다 지금은 문을 닫은 국일다방. 항도장 인근의 국일다방은 한때 지역을 쥐락펴락했던 노신사들의 만남의 장이요, 추억의 공간이다.

지역문인들을 거론하면서 가장 회자된 곳을 꼽으라면 비둘기다방과 전원다방일 것이다.

이곳은 전북은 물론 전국에서 맹활약하던 시인들의 활동무대여서 군산의 다방을 거론할 때 대표적인 곳으로 떠오른다.

그 이유는 1948년 군산문학협회가 발족된 뒤 1953년 6월 토요동인회가 창립돼 지역을 망라해서 전국적인 예술인들이 이곳을 다녀갔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는 한국전쟁이란 독특한 상황 때문에 유명 문화예술인들이 대거 군산으로 이주한데 따른 것이다.

고은 선생을 비롯 서울대 미대출신 화가 나병재,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피난만 화가 홍건적, 사장 육영술씨의 여동생이었던 육정림(무용: 군산의 무용선구자였다. 1953년 역작 아리랑을 군산극장에서 발표), 송기원 회장(대한제국 육군장교이자 갑부였던 송병식의 3대 독자), 정윤봉 총무(군산의 전설적인 여류시인: 호남고무사장 부인) 등이 토요동인회를 결성, 군산문화예술의 황금기를 열었다. 전쟁의 상흔을 깨끗하게 씻어내기라도 하듯 맹렬한 기세로 문학과 예술에 빠져들었단다.

토요동인회란 이름의 유래는 토요일에 모임을 가졌다는 이름에서 유래는 했지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느 말라르메(1842~1898년)가 주재한 ‘화요회’에서 원용했단다.

한국전쟁 중이어서 처가로 피난왔던 운보 김기창 화백과 그 부인 우향 박래현 화백 등도 비둘기다방을 오가며 군산화단을 꽃피우는 힘이었다.

19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군산은 전무후무한 전국적인 문학인들이 교류하는 장으로 우뚝 선다.

특히 1955년 1월은 특별한 때였다.

당대의 기라성 같은 가람 이병기선생(1891~1968)과 신석정(夕汀)선생(1907~1974), 김수영 시인(1921~1968), 최승범 시인(1931~ 현재) 등이 교류하면서 꽃을 피웠고 매년 시화전을 열어 문화예술의 열기가 가득했다.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익산 출신)은 이론과 창작으로 20세기 시조 중흥에 기여한

선각자다. 그는 생전 50년간 꾸준히 일기를 썼을 뿐 아니라 학자요, 교육자였다.

석정은 부안출신으로 김제고와 전주상고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목가적인 작품을 남긴 시인이다. 시집으로 촛불, 슬픈 목가, 빙하 등이 있다.

김수영은 모더니스트로 출발, 현실비판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작품에는 시집 달나라의 장난, 거대한 뿌리 등이 있다.

고하 최승범 전북대 명예교수는 남원출신으로 신석정의 큰 사위다. 그는 설경, 소낙비 등으로 등단했고 후조의 노래 등 시집과 수필 등을 써온 국문학자다.

이런 내용은 가람(이병기)일기와 고은 선생의 자전소설 ‘나의 산하 나의 삶’(경향신문 1990년 연재)’, 군산시청 동장으로 퇴직한 최영 시인(작고)의 군산풍물기 등을 참조했다.

이후 1970~90년대 군산문인들은 월명동 일대에서 활동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한 채 순수 지역동인회로 전락했다.

한편 가람은 1996년 도내 일간지 기자로서 익산에서 근무했을 때 그의 고향(여산면) 생가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전형적인 가난한 선비의 집이었다.

취재차 들렀는데, 그의 둘째 며느리가 집을 지키고 있었고 가람의 자식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 며느리에 따르면 가람에게는 아들 여럿이 있었는데 그중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끌려간 가람의 큰아들은 귀향하지 못해 생전 가람과 그의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가족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다수 작품과 관련된 내용은 서울대 규장각에 기증하는 바람에 이 생가에는 복사본만 남아 있었다.

 

운보 김기창‧ 우향 박래현과 군산… 필자와 작은 인연

운보 김기창 화백(1913~2001)이 오늘에 존재한 이유는 부인 박래현(1920~1976)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운보 자신도 자신이 존재하게 한 세 여성을 꼽으면서 어머니와 부인, 초등학교 은사(여성교사)를 지칭할 정도였다.

운보는 1943년 서울 운니동 자택에서 평생의 반려자 박래현과 만난다. 박래현이 일본 도쿄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특선한 뒤 시상식에 오는 길에 운보를 찾은 것이다.

3년 뒤 두 사람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 맹렬한 작품 활동에 들어갔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처가인 군산시 구암동으로 피난했다. 이때가 중공군이 진주한 1.4후퇴를 하면서 처가로 내려온 것이다.

운보는 이 기간 비둘기다방에서 피난 온 문인 및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작품활동에 몰두한다. 이 시기에 ‘예수의 일생’연작 30점을 그렸고, 이 연작에 우리나라 사람의 얼굴에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운보와 우향은 1947년 한국 부부 최초 부부전인 ‘김기창· 박래현 부부전’을 개최한 후 20회에 가까운 부부전을 열어 한국화단에서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동양화가 박래현은 1920년 진남포에서 출생했지만 6세 때 부친을 따라 군산시 구암동으로 이사와 군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전주공립여자고등 보통학교(전주여고 전신), 동경여자전문학교 일본화부 사범과를 졸업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동양화의 전통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했다. 나중에는 명쾌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순수추상에 몰두했다. 대표작으로는 노점, 이른 아침 등이 있다.

약 10년 전 지역원로언론인이었던 고 김병남 군산신문 회장은 운보와 관련, 재미난 얘기를 기억하며 회상했다. 김 회장은 1960년대 어느 시기에 운보의 작품이 없어졌다며 서울성동경찰서에서 군산까지 찾아와 수사의 단서를 찾았다는 얘기를 했다.

나중에 운보의 개인운전사가 그림을 절도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군산에서 운보와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전해줬다. 박래현의 오빠 중 한사람은 지역에서 고교의 교사로 몸담았고 70~ 80객들에게 그에 대한 얘기는 아직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을 정도다.

운보와 관련된 취재 후기는 필자에게도 있었다.

1993년 여름 어느 토요일 오후 도내 일간지에서 문화부기자로 근무하던 중 운보와 관련된 취재지시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없었던 만큼 그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전주의 H서점에 들러 그와 관련 책을 사서 기본 정보를 메모한 후 만났다.

그의 삼중 장애 때문에 그의 아들과 대신했던 인터뷰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물론 그와 인사는 했지만 제대로는 아니었다.)

그 시절에 기억나는 것은 운보의 3명의 여성 은인(어머니- 여성 은사- 부인)을 질문한 적이 있었고 지금도 그 시절에 구입했던 그 책을 소장하고 있다.

아마 그와 관련된 것을 최근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 시절 취재 경험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내용은 아련하지만.

소와 유동 등의 걸작을 남긴 박수근 화백이 한국전쟁기에 군산으로 피난, 부두에서 노동자로 일한 것을 작품화한 것이 옛 백년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 사진= 투데이군산
소와 유동 등의 걸작을 남긴 박수근 화백이 한국전쟁기에 군산으로 피난, 부두에서 노동자로 일한 것을 작품화한 것이 옛 백년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 사진= 투데이군산

 

한편 운보와 우향과 달리 한국전쟁기에 군산과 인연이 있는 화가는 박수근(1914~ 1965)이다.

생전에 가난과 싸우다 병마로 세상을 떠난 민중화가였던 박수근은1.4 후퇴 때 가족과 헤어져 군산으로 피난왔다. 군산에서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지만 부두노동자로 연명하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가족을 찾아 서울로 갔다.

그의 작품은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민족의 정서가 향토색 색채로 함축되어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 많은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풍경, 나무, 두여인, 풍경,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소와 유동’ 등 70여 점을 남겼다.

그의 부두노동을 기린 작품화한 것이 옛 백년광장에 있는 ‘부두의 노동자상’이다.

 

 

우리나라 다방의 역사

다방이란 말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언제였고 오늘날 다방의 역사는 얼마나 될까?
7세기 중엽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한송정’ 은 화랑들의 다원으로 우리나라 다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연못을 내다보면서 운치 있게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인 다연원(茶淵院)은 통일신라 시대 최고의 다실로 1968년 경주 창림사에서 다연원의 기왓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다방이라는 용어는 고려 때 처음 등장한다. 당시 다사와 주과의 나랏일 주관하는 국가 관사가 다방이었던 것이다.

개화 바람으로 우리나라에 커피가 보급되었는데 고종이 이를 즐겨 마셨단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맛보았고 환궁한 후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놓고 이곳에서 커피를 즐겨 마시곤 했다.

개항기 최초의 다방은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처형인 손탁(1854~1925)이 1902년 손탁호텔을 지어서 호텔식 다방을 선보였다. 서울 600년사 제4권의 다방 부분을 참고하면 청목당이 서울에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양주를 팔고 차와 팔 수 있는 구조로 1914년 조선호텔이 생기기 전까지 최고급 식당이자 찻집이었다. 이런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호텔1층이 자리 잡고 있는 커피숍의 기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커피는 처음에 가배차(珈琲茶)나 가비차(加比茶)로 음역됐고 양탕국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다방은 일본인 후타미가 남대문역에 문을 연 ‘기사텐’다방이 1913년 운영되고 있었으나 처음 개업 시기는 1909년 11월1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창업한 것은 1927년 봄에 영화감독 이경손이 하와이에서 데려온 묘령의 여인과 종로구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였다.

1930년에 들어서 다양한 다방이 각각의 특색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유흥공간으로 자리를 잡는다. 소설가 이상이나 예술인 등이 초기에는 사업에 뛰어들어 당시 개화사상 전파를 주도했단다. 다방은 당시에 끽다점, 찻집, 티룸 등으로 불리였으며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됐다. 다방의 경영자가 누구이고 어느 곳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그 다방만의 특색이 드러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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