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42] 군산의 유흥문화 과거와 현재… ‘잔영과 흔적’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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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42] 군산의 유흥문화 과거와 현재… ‘잔영과 흔적’ 곳곳에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1.10.1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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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문화…1980년대까지 군산 밤 문화 지배… 요정 90년대 중‧ 후반 쇠락
1990년대 이후 룸살롱‧ 노래방‧ 나이트 클럽‧ 스탠드바 등 현대적 유흥업소
2000년대 잇단 유흥업소 대형참사로 ‘인권문제 대두’로 사회적인 흐름 급변

‘군산을 걷다’ 시리즈물에서 언급하기가 거북한 내용이 아무래도 유흥문화인 것 같다.

그동안 다뤄온 원도심권에 있는 다양한 소재 이외에도 제외된 구시장로 등에 있었던 과거 유명 음식점, 요정, 각종 유흥업소가 존재했던 만큼 이를 한꺼번에 정리하고자 한다.

다소 민감한 내용일 수 있는 만큼 애독자 여러분의 혜량(惠諒)을 청한다.

인류의 탄생 이후 가장 먼저 생긴 직업 중 하나가 성(性)과 관련됐다 한다. 우리 전통문화에서 이와 관련해서는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졌다. 조선시대는 유교라는 통치철학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근대기에 접어들어 군산의 상황은 급변했다.

전통적인 문화가 근대문명 유입과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과거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게 변한 것이다.

일제의 강압적인 상황을 벗어난 해방 직후 미군 주둔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두운 단면과 깊은 연관이 있는 유흥산업의 출현이었고 관련 업종의 변화상에는 매춘(賣春)과 인권 유린 등의 문제와 관련이 적지 않다.

근‧ 현대기를 거치면서 지역 유흥산업(문화)의 출현과 번성, 쇠락 등의 변화과정이 원도심권과 구시장로 주변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통적인 기생문화의 변질… 갑오개혁과 일본 침략

1894년 갑오경장(개혁)은 엄청난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문벌과 반상제도(班常制度)의 혁파, 문무존비(文武尊卑)의 차별 폐지, 공사노비법(公私奴婢法)의 혁파, 역인(驛人)· 창우(倡優)· 피공(皮工) 등 천인의 면천, 죄인연좌법(罪人緣坐法)의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이 그것이다.

관기 제도의 혁파를 통해 기생들이 차츰 자유신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기생들은 △ 일패(一牌) △ 이패(二牌) △ 삼패(三牌) 등 세 가지 부류로 나눠졌다. 일패는 예인(藝人), 이패는 예인급이지만 가끔 매춘하는 경우였다. 이패는 세간에서 그녀들을 ‘은군자’ 또는 ‘은군짜’로 부르곤 했다.

삼패는 돈만 주면 매춘하는 조선시대와 전혀 다른 3류 창부문화로 전락하는 부류의 기생들이었다. 이로써 사실상 공창제도가 허용된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강화됐다.

조선시대의 상대적으로 고급의 기방문화가 주류를 이루던 것이 일제에 의해 유곽의 창기제도와 같은 삼류 밤 문화의 뿌리가 내려졌다.

원도심권의 골목길을 돌아보면 이런 문화의 잔영이 남겨진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극장가 주변의 개복동과 500고지, 대명동, 신영동 등이 바로 그곳이다.

최근 100년 동안 우리나라는 물론 군산의 유흥문화 변화상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눴다.

△ 근대기~ 해방까지 △ 해방 후 ~ 1980년대 말 △ 1990년대 이후 등을 다뤄 시대변화상과 특징적인 내용을 담았다.

우리 선조들은 20세기 들어 유명요리집을 비롯한 기생집, 유곽, 그리고 은근자 마을 등을 출입했고 일본인들은 요정과 유곽을 주로 출입했다. 일본인들은 침략자로서 본성과 함께 저급 유흥문화의 유통을 통해 본격 공창제도를 유입했다.

군산에도 물밀 듯 들어와 그 잔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근대기~ 해방까지 ‘일제강점기’…권번과 요정 등장

국내 최초 유곽은 부산(1902년)에 이어 서울의 신정유곽(1904년)이 들어왔고 한일강제 합방과 함께 전국적인 흐름으로 변했다.

당시 점령국의 일본인들은 현대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처럼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돈벌이 수단 때문이었고 자신들의 쾌락 등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명산동(당시 신흥동) 유곽을 시작으로 1930년대 일본인 유곽만 8곳에 이른다. 조선인 유곽도 금강루와 청남루 등 3곳이었단다.

당시 유명했던 유곽은 2002년 화재로 사라진 칠복(명산동 화교소학교)과 군산루, 송학루, 송야 등이었다. 아직까지 명산동 시장 주변에는 옛 일본식 관련 건물들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유명 요리집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출입했던 유곽에 비해 돈 많은 당시 한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이들은 식사와 술, 그리고 권번(券番)에서 조선의 전통적 기생교육을 받은 예인들의 기예를 보면서 풍류를 누렸다.

권번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이 기적을 둔 조합으로 기생들의 요리집 출입을 관리해주고 수고료를 받아주는 역할을 했다. 당시 기생들은 공식 허가를 받은 일종의 허가제 직업인으로 권번을 통해 세금을 냈다.

조종안 기자와 김중규의 군산역사이야기 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3곳의 권번(군산권번, 보성권번, 소화권번)과 두개의 기생조합(한호예기조합, 군창예기조합)이 존재했단다.

권번에서 가무와 글을 익힌 기생들은 1930년대 군산의 대표 요리집이었던 명월관(옛 유성예식장)과 대명동에 위치한 근화각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 시기 명월관 주변 공터와 정원 등에는 향나무 200여 그루가 심어졌을 정도로 엄청났다.

해방 후~1980년대 중‧ 후반…요정문화와 서양퇴폐유흥문화

미군정청은 미군 진주와 함께 공창제(1948년 2월)를 전면 폐지했고 유곽문화는 사라졌다. 해방 직후 군산의 요정은 연정(옛 명월관)만 명맥을 유지했고 이후 감독 가는 길 사이에 공집이 생겼고, 그 뒤 장미동 만춘향 건물 앞 연못이 있는 기와집에 연희정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했다.

1960~70년대 군산경제 상황은 합판산업과 백화양조가 호황을 누리면서 크게 번성한다. 이 시기에 선양동의 송죽과 개복동의 은마라는 고급 요정이 생겨 한시대를 풍미했고 또 원도심권에 텍사스 골목과 감뚝 등도 활성화됐다.

앞서 한국전쟁기에는 중앙초와 옛 공설운동장(일제강점기의 일출운동장: 중동 돌산 주변)에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근접지역에 있던 구시장 감독가와 군산극장 인근으로 유흥업소들이 대거 이주, 주변이 환락가를 이뤘다.

옛 아메리카 타운
옛 아메리카 타운

 

일제강점기 최고의 번화가를 자랑하던 곳은 미국인 거리(전용유흥가)로 발전했지만 도심 풍기를 해치는 심각한 상황은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논란이 커졌고 이전 문제가 본격화됐다.

이런 논란 끝에 1969년 당시 옥구군 미면인 오늘날의 미성동소재 국제화마을(속칭 ‘아메리카 타운’)로 옮겨갔다.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 최고 번성기를 누리다가 미군 감축 등으로 크게 위축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에는 내국인보다는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등의 젊은 여성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

1960년대 중‧ 후반 수출이 본격화되면서 군산의 유흥산업도 크게 탄력을 받았다.

그야말로 전국은 요정문화가 압도한 시대였다. 전북경제를 주도하는 군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정치인은 물론 행정기관 및 기업체 고위관계자 등이 상호간의 계약이나 청탁, 정치 조율 등을 하는 과정에서 이곳은 밤문화의 핵심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연정과 송죽, 영화동의 초정, 개복동의 은마 등 지역 요정집들이 전성시대를 누렸다.

이 시기의 흐름을 잘 보여준 내용 신문의 기사였다. 1975년 당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에 실린 내용으로 유흥업소 등 개점휴업이란 동아일보의 사회면 기사에는 공무원들이 서정쇄신 작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시작됐다는 보도였다.

또 경향신문의 경우 군산세무서는 그 시기(1975년) 주세목표액을 70억원을 책정했지만 서정쇄신 등으로 유흥업소 등이 불황을 겪으면서 술이 안 팔려 주세징수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는 내용도 있다.

요정문화의 흐름을 보면 기생제도 본격 폐지 이후 궁중음식 전문요릿집이 요정이라는 음식점 문화로 발전하다가 1980년대까지 성행하다가 사라졌다.

서울 등지도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정권실세들이나 기업인들의 만남이 바로 요정에서 비롯됐다. 서울의 경우 오진암과 삼청각, 대원각, 청운각 등이 그런 류의 대표 요정들이었다.

군산의 요정시대는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사회가 급변하면서 좀 더 동적이거나 접근이 쉬운 룸살롱과 노래방 등에 밀려났다.

군산의 마지막 요정인 은마가 위치했던 신고궁 건물. / 사진=투데이군산
군산의 마지막 요정인 은마가 위치했던 신고궁 건물. / 사진=투데이군산

 

군산의 마지막 요정이라 할 수 있는 은마는 1993년 조촌동으로 이전, 새로 건물을 짓고 영업했으나 얼마되지 않아 문을 닫고 한식당으로 변했다.

몇 차례에 걸쳐 주인이 바뀐 후 변모를 거듭했다. 전설적인 요정 송죽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군산의 마지막 요정문화를 겪은 세대들은 60살 초반층이다.

1980년대와 1990년 초‧ 중반까지 한정식이 차려진 음식과 양주‧ 정종‧ 마주앙 등의 술에 의해 한상에 가격이 매겨진 시기였다.

일반 방(룸)에 큰상이 차려졌을 뿐 아니라 그곳의 여종업원들은 단아한 한복을 입고 들어왔고 국악과 밴드 등까지 등장했단다.

이들 요정에는 한집에 5~ 6개의 방이 있었고 손님이 이곳의 아가씨들 중 한명을 간택하는 과거 기생문화도 다소 남아 있었다는 게 60대의 한 사업가의 기억이다.

90년대(또는 80년대 중후반) 이후… 룸살롱 등 유흥업소 다변화

수도권을 중심으로 룸살롱과 노래방, 나이트 클럽 등의 새로운 유흥업소가 성업하면서 과거 유흥문화 형태는 사라졌다.

이후 한국관과 백악관 등의 나이트 클럽과 동경‧ 풍차 등 대형 스탠드바, 가라오케 등이 호황을 누렸다. 이 시기에는 유흥업소가 나운동지역으로 대거 이전하거나 가요주점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끝없는 호황을 누릴 것으로 보였던 유흥업소가 대형참사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아 일격을 당했고 엄청난 변화 속에 있다.

2002년 개복동 유흥업소 대형참사현장. / 사진=투데이군산
2002년 개복동 유흥업소 대형참사현장. / 사진=투데이군산

 

대명동 쉬파리 골목 화재사고(2000년)와 개복동 유흥업소 대참사(2002년)는 전국적인 여론 악화와 사회적인 경각심으로 이어졌다.

여성단체와 시민사회단체의 노력은 관련 법령 제정 등으로 유흥문화의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가부장제 사회의 산물이자, 사회의 치부였던 성매매는 자본주의의 병폐이면서 전근대적인 유산이기도 하다.

약자인 여성에 대한 인권문제는 그 어떤 것으로 변명하던 치환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오직 범사회적인 각성과 자성이란 사회적 과제를 남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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