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58] 옛 시립도서관… 근대기 학문의 산실 역할 ‘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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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58] 옛 시립도서관… 근대기 학문의 산실 역할 ‘톡톡’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2.0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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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전 : 해신동→ 중앙동(1928년)→ 문화동(1975년)→ 수송동(2009년) 우뚝
군산이 낳은 최고 수재 ‘김수경’… 현재의 군산중앙초‧ 군산중(5년제) 졸업
강원도 태생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부친따라 군산 이사… 월북 후 북한 국어학자로 우뚝

군산은 서해권에서 근대기에 문물과 사상이 가장 생동감있게 움직였던 곳이었다.

초기에는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고 후엔 이런 근대문화 기반 아래 일본인의 침략 전진기지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문명의 꽃과 같은 도서관이 전국 5번째이자 도내 최초로 들어섰다.

당시 대학 외로는 최고의 학부라 할 수 있는 중학교(5년제)가 전주보다 먼저 설립된 곳이다. 물론 일제의 침략 야욕과 깊은 연관을 지녔기 때문이었으리라.

처음 도서관이 들어선 장소는 오늘날의 해신동사무소(옛 군산상공회의소이자 공회당)가 있는 곳이었지만 다음으로 이전한 곳이 옛 시청광장 자리다. 이때 명칭은 ‘군산부립도서관’이었다.

해방 후 이 건물이 시설 노후와 이용상 문제가 되자 문화동에 옛 중앙도서관이 1975년 다시 건축됐다. 문화동 중앙도서관은 중앙일보가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군산시에 기증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작은 소공원으로 변해 시민휴식공간이 됐다.

문화동의 옛 시립 도서관./사진=군산시청
문화동의 옛 시립 도서관./사진=군산시청

 

후에 명칭의 변화도 거듭했다.

1995년 12월26일 송풍동의 청소년회관(도서관, 수련관)이 신축 개관, 이곳으로 군산시립중앙도서관을 이전했다.

또 2009년 6월 9일 청소년회관 도서관에서 수송동 군산시립도서관으로 이전, 개관했고 새로 만들어진 작은 도서관만도 약 20곳에 이른다. 이곳의 장서만도 55만9580권에 이를 정도니 110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왔다.

수송동의 군산시립도서관. / 사진=투데이군산
수송동의 군산시립도서관. / 사진=투데이군산

 

# 군산도서관의 탄생…도내 최초이자 전국 5번째

군산은 1899년 개항한 지 13년만인 1912년에 군산에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호남에서 두 번째로 개관한 근대도서관이다.

군산이 ‘군산부’로 승격하는 시기는 1914년이다. 부 승격 이전에 도서관이 먼저 문을 열었다.

1931년 발간된 조선지도서관(朝鮮之圖書館) 창간호는, ‘조선도서관일람’을 통해 당시 조선 도서관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군산도서관보다 더 빨리 문을 연 도서관은, 부산부립도서관(1901년), 사립인천문고(1911년), 순천도서관(1911년), 안성도서관(1912년) 4개뿐이었다.

경성(지금의 서울)도 1920년대 들어서야 공공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군산은 서울보다 8년 빨리 도서관이 개관했다. 군산에서 도서관이 얼마나 빨리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있다.

개관 시기만으로 볼때 호남에서 순천도서관의 개관이 가장 빨랐다. 다만 순천도서관은 1930년대까지 장서가 500여 권을 넘지 않았었다.

군산도서관은 1930년대까지 호남에서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최고의 도서관이었다. 부산부립도서관, 다음으로 군산도서관의 장서가 가장 많았다.

도서관뿐만이 아니다.

전라북도에서 유일한 중학교도 전주가 아닌 군산에 있었다. 군산중학교가 그곳이다.

군산중학교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과 김일성대학 도서관, 중앙도서관, 인민대학습당에서 차례로 일한 석학이 바로 김수경(金壽卿)이다.

김수경은 군산의 근현대사에서 배출한 가장 뛰어난 석학이자 도서관인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여기서 잠시 군산도서관의 개관 이야기를 풀어보자.

일제강점기 군산을 대표한 지주(地主)가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다.

구마모토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구마모토는 전북에서 조선총독부 산하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이외에 최고의 땅부자였다.

1910년대 초 군산에서 도서관 설립 운동이 추진된다.

군산도서관은 1912년 2월 당시 일인들이 중심이 된 도서관 설립 준비위원회가 장서 240여 권을 군산교육회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 문을 열었다. 1912년 설립된 군산교육회는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강연회, 강습회를 개최했다.

1920년대 군산도서관의 옛 모습. / 사진= 군산시청 제공
1920년대 군산도서관의 옛 모습. / 사진= 군산시청 제공

 

구마모토는 1914년 6월 농사조합사무소로 쓰던 건물과 비품을 군산교육회에 기부했다. 구마모토가 기증한 건물은, 38평 면적의 서양식 목조 2층 건물이었다.

그의 기부를 계기로 군산도서관의 운영은 전환점을 맞았다.

일제강점기 상당수 도서관은 일본인 또는 일제에 의해 유사한 과정을 거쳐 문을 열었다. 우리 근대도서관 대부분은 ‘일본인을 위한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군산도서관은 장서 5,000권을 갖췄고, 많은 예산을 들여 매월 신간을 구입, 당대에선 최고 도서관의 면모를 갖췄다.

운영방식은 회원제였다. 비회원도 회원의 소개가 있으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군산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금동소재 해신동주민센터다.

해망굴 동쪽 출구와 가깝다. 점방산, 장계산 등 월명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아주는 자리다.

군산도서관은 1932년 군산부가 직접 운영을 맡으면서, 군산부립도서관으로 바뀐다. 도서관 운영 주체가 민간(군산교육회)에서 공공(군산부)으로 바뀐 것이다.

1930년대 군산도서관의 옛 모습. / 사진= 군산시청 제공
1930년대 군산도서관의 옛 모습. / 사진= 군산시청 제공

이 과정에서 군산부는 1932년 8월 도서관을 이전했다. 군산부립도서관이 이전한 곳은 군산부청사로 쓰던 건물이다. 그 위치가 옛 시청광장 자리.

당시 군산부는 많은 예산을 들여 도서관 건물을 이전했다.

군산부립도서관 1층에는 특별관람실과 신문관람실, 서고를 배치하고, 2층에는 남자 열람실과 부인 열람실을 두었다. 도서관 면적은 105.5평이었다.

1933년 무렵 도서관장은 후지타 키쿠지(藤田菊次)다. 그가 조선도서관연구회 회원으로 입회한 기록이 조선지도서관에 남아 있다.

군산도서관과 군산부립도서관의 입지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원도심에서 도서관이 차지한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당시 도서관은 군산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교육문화시설로 기능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공공도서관이 도심이 아닌 주변부에 지어진 걸 고려하면, 일제강점기 도시 중심부에 자리한 도서관 입지는 상당히 시사적이다.

1934년 12월 현재 군산부립도서관의 장서량은 8,851권이었다. 군산부립도서관 장서는 군산부문고(2,619권), 전북문고(824권), 교육회문고(4,346권), 오쿠라문고(525권), 일반문고(527권)를 합쳐 출범했다.

군산부립도서관 출범 이전에 군산부에 군산도서관(교육회문고) 뿐 아니라 작은 도서관이 상당수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산부립도서관은 열람 문고를 설치해서 먼 곳까지 대출을 했다.

일제강점기 군산도서관은 호남 일대, 나아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도서관 중 하나였다.

아마도 이곳을 이용하며 공부하면서 학자의 길이나 관직 등의 꿈을 꿨던 당시의 옛 선조들도 적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중에도 당대의 석학이자 시대의 이단아였던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이었던 김수경도 그의 청년기에 이곳을 이용하며 꿈을 키웠을 것은 분명하다.

그는 오늘날의 군산중앙초와 군산중 등을 졸업한 군산인이었고 천재언어학자였다. 북한의 가로쓰기와 한글전용 등을 이끈 국어학자였다.

아래 내용은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등에 보도된 자료를 참조했다.

# 북한 김일성대학 초대 도서관장 김수경(1918~ 2000)은 누구… 천재언어학자

김수경은 1918년 5월 1일 강원도 통천군 통천면 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선득은 평북 신의주에서 판사로 일하다 사직하고, 군산으로 이사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1925년 8월 7일 김수경의 가족은 군산으로 이주했다. 그의 나이 7살 때였다.

그는 1930년 군산제일보통학교(지금의 군산중앙초)에 이어, 1934년 군산중을 졸업했다. 당시 군산중은 일본 학생을 위한 학교였고, 전북에서 유일한 중학교였다.

5년제 중학교 과정을 4년 만에 졸업한 그는 1934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예과를 거쳐 193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언어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경성제대 시절 그에게 언어학을 가르친 스승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다. 그는 당시 저명한 언어학자로 주목받고 있었다.

1940년 3월 31일 경성제대를 졸업한 김수경은 같은 해 4월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대학원 언어학 강좌에 진학했다.

김수경은 비교언어학 관점에서 조선어를 연구했다.

일본 유학 중이었던 그는 1943년 3월 17일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이남재와 결혼했다.

이듬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연구실에서 근무했다. 해방이 되던 해 12월에는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가 됐고 이 시기쯤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그와 절친했던 경성제대 동문 김석형(1915~ 1996: 북한의 역사학자)‧ 박시형‧ 신구현 등이 모두 월북한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이미 대학시절에 사회주의 사상에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수경은 1946년 5월 프랑스의 위대한 동양학자이자 서지학자였던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 1935)의 조선서지(朝鮮書誌) 서론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조선문화사서설(朝鮮文化史序說)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 북한 언어 분야에 그가 남긴 영향… 가로쓰기‧ 한글전용 문자개혁 등 앞장

김수경이 1946년 8월 월북한 이후 그의 저작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조선문화사서설 이외에 ‘세 나라 시기 언어 력사에 관한 남조선 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평양출판사 1989년)이 ‘고구려‧ 백제‧ 신라 언어 연구’(한국문화사)라는 제목으로 영인 출간됐다.

1946년 10월 1일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은 김두봉.

1949년 9월 시점에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에는 조선어학과, 조선문학과, 신문학과 3개 학과가 있었다. 그는 조선어학과 창립 회원으로 강좌장 자리에 올랐다.

북한은 ‘노동(勞動)’을 ‘로동’으로 표기한다. 두음법칙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음법칙 폐기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1947년 6월 그가 북한의 로동신문에 기고한 논문에 따른 것이다

해방 이후 북한은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한자를 배제하고 한글을 전용으로 쓰는 문자 개혁 과정을 거쳤다.

김두봉과 함께 김수경은 북한의 문자 개혁을 이끌었다.

조선어문연구회를 이끌고 1949년 발간한 조선어 문법 편찬을 주도한 사람도 김수경이다.

그는 언어학자답게, 여러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무렵까지 그가 익힌 언어는 15개(그리스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몽골어)에 이른다. 이 중 7개 언어는 ‘직독직해직강(直讀直解直講)’이 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195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이 설립되면서 그는 연구사를 겸임했다.

북한 최고 두뇌를 모았다는 과학원 초대 원장은 홍명희가, 2대 원장은 백남운이 맡았다. 과학원은 사회과학 분야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를 설치했고, 김수경은 연구실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후 김일성종합대학은 1953년 9월 평양으로 돌아왔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다시 교편을 잡으며 연구에 매진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철자법 제정과 문자개혁을 주도하고, 이 과정에서 표음주의(소리대로 적는다는 의미)가 아닌 형태주의(어법에 맞도록 적는다는 의미) 원칙을 강조했다.

다만 우리는 표음주의를 일부 받아들여 형태주의와 절충하고 있다.

1961년과 1962년에 3권으로 출간한 ‘현대 조선어’는 북한 대학에서 교과서로 쓰였고, 북한 국어학의 기초가 되었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모국어로 조선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김수경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언어학자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4년 그가 쓴 조선어 문체론은 북한 최초로 문체론을 체계화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 가족과의 긴 이별. 그리고 짧은 만남

그에게도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은 너무도 컸다.

이산가족이 된 김수경 가족의 긴 이별은 이렇게 시작됐다.

전쟁이 나고 김일성대 교원들로 구성된 단기 선무공작대 일원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던 그가 북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아내와 2남 2녀 자녀들과 길이 엇갈린 것이다. 그의 부친도 전쟁 중에 사망했다. 월북한 까닭에 소식이 긴 시간 동안 끊겼다.

그는 1955년 북한의 문자 개혁을 조사하러 방북한 중국 문화대표단과 교류했다. 또 1956년 중국과학원 초청을 받아 홀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북한뿐 아니라 중국 언어학계에까지 떨친 김수경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 후 그의 생사 소식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1959년 경성제국대학 시절 스승 고바야시 히데오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바야시는 한국의 제자(국어학자) 이숭녕(李崇寧: 1908~ 1994)에게 김수경의 소식을 전했다.

경남 밀양시에 살던 그의 가족은 이 교수를 통해 아버지와 남편의 생존 소식을 확인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월북한 그의 존재는 남한의 가족에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정보기관에서 나온 사람이 김수경의 생사와 행방을 계속 캐묻자, 가족은 결국 그를 사망으로 처리했다.

가장과 떨어져 남녘 땅에 묶인 자녀 넷 중 셋과 아내(고 이남재)는 김수경을 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으로 1970년대에 캐나다로 떠났다.

고인이 된 맏딸 혜자씨는 국외에서 부친 소식을 알아보겠다며 일부러 외국 진출이 쉬운 간호학을 전공해 가족 이민을 이끌었고, 1948년 평양에서 태어난 둘째 딸 혜영씨는 부친 소식을 한 조각이라도 더 얻으려고 토론토대학에서 뒤늦게 언어학을 공부했다.

캐나다 비자를 얻지 못한 차남(태성)은 대신 독일에서 이 나라 어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부산대에서 30년 가까이 독일어를 가르쳤다.

캐나다의 가족들은 토론토를 찾은 연변대 교수 도움으로 1986년부터 그와 편지 교환을 했고 1988년에는 드디어 혜영씨가 북경대학에서 열린 조선학 학술대회에서 부친과 극적으로 만났다.

그의 아내도 남편이 별세하기 2년 전인 1998년에 평양에서 상봉해 ‘반세기 이별의 한’을 풀었으나 얼마 후 생을 마감, 또다른 이별을 고하는 안타까움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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