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60]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지역 통합의 저력’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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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60]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지역 통합의 저력’ 작용
  • 정영욱 기자
  • 승인 2022.02.2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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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상고 호남야구의 산실이자 중흥 선봉장 역할 톡톡
올핸 역전의 명수 탄생 50주년의 해… 전국적인 명성 때문에 교명 변경이 변수
학교 위상 추락 막을 특단의 조치 여론 고조… 인문계 전환 놓고 지혜 모아야
군산상고
군산상고

 

대학로에서 월명공원(석치산) 방향으로 가면 도내 최초의 상업학교인 군산상고가 있다.

군산상고는 1941년 4월1일 군산공립상업학교란 이름으로 개교했다.

일제강점기 말 항구도시이며 도내 상공업 중심인 지역사회의 요청에 따라 전라북도에서는 최초로 설립된 상업교육기관.

당시 교사를 마련하지 못하여 옛 군산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을 거행하고 교실을 빌려 수업해야 했다. 1942년 12월 1일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했다. 1944년 3월 제1회 졸업생 46명(일본인 22명)을 배출했다.

1947년 5월 군산공립상업중학교를 거쳐 1950년 5월 군산상업고등학교로 바뀌어 도내 최고의 상고 역사를 쓰고 있다. 대부분 옛 상고명칭을 삭제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출발했다.

광복 후 초대 교장에 김부영(작고) 교장이 취임했고 당시의 학생수는 144명이었다.

처음에는 남학교로 출발했으나 1987년 7월 여학생 2학급을 인가받아 남녀공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여년 역사와 전통만큼 수많은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한국야구계의 걸출한 스타와 지도자들을 길러낸 이 학교는 스포츠 이외에도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산실이었다.

특히 신상훈 전 신한은행장을 비롯한 전 신한카드 사장, 송동규 전 전북은행 부행장‧ 김명렬 전 부행장, 이성린 부행장, 두형진 전 전북은행 부행장보, 고계곤 군산원협조합장 등과 같은 금융맨이 이곳 출신이다.

이뿐 아니다.

변호사로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김길준 전 군산시장(작고)과 김남두 정상급 테너, 민우혁(본명 박성혁) 성악가 등은 물론 군산시청에서 과장 및 국장, 경찰 간부 등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이곳 졸업생들은 야구명문학교 출신답게 지역에서 사회인 야구와 직장야구 등을 이끌고 있다.

그동안 군산상고 출신 유명선수로는 김봉연 전 극동대 교수(28회), 김준환 전 원광대 감독(28회), 김우근(30회), 김종윤 전 SK코치(32회), 김용남 전 해태투수(32회), 김성한 전 감독(33회),나창기 전 호원대(군산상고 감독 역임) 감독(27회) 등이 그들이다.

또한 조계현 전 기아타이거즈 단장을 비롯한 이광우(40회)‧ 정명원(40회), 조규제(42회), 오상민(48회), 정대현(52회), 이승호(55회), 차우찬(61회) 등의 투수들도 기억할 만한 프로야구 출신 선수들이다.

이와 함께 국민중견수로 각광을 받았던 이진영(54회) SSG 랜더스 타격코치, 김평호(37회) 롯데자이언츠 외야수 및 작전주루코치, 문규현(57회) 롯데 수석코치, 석수철(47회) 군산상고 감독 등도 역전의 명수의 후예들이다.

이밖에 송경섭 전교장(12회)은 야구부장 및 교감재직 중 전국대회 12차례 우승이란 진기록을 세울 정도로 야구와 인연은 각별, 야구교장이란 호칭받기도 했다.

이곳 졸업생만도 약 2만 1,600명을 배출했다.

 

# 군산상고는 어떤 학교… 육상‧ 탁구‧ 야구 등 전국적인 체육 명문 자랑

도내 최초이자 최고의 상업교육의 요람인 이 학교는 암울한 식민지 시기를 거쳐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게 중견 직능인 육성을 담당해왔다.

이 학교 동문들은 사회 각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야구와 탁구 등 체육부문에서 전국을 무대를 평정한 바 있다.

군산상고의 자랑은 오랜 역사에만 있지 않다.

1950년 전쟁 중 국토방위의 수호자로서 자랑스런 역사도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3학년생 이상 180여명의 학생이 학도병으로 자진 입대해 45명이 산화하는 등 투철한 애국심을 발휘,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오늘의 군산상고를 만든 것은 왕성한 체육활동과 뛰어난 기능교육 때문.

최근에는 야구명문학교로 더 알려졌지만 개교부터 모든 운동의 기본인 육상을 비롯한 탁구, 검도 등 왕성한 체육활동으로 명성을 떨쳤고 주산 및 부기는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특히 전쟁 중인 1951년 보스턴 국제마라톤대회 2위에 올라 세계만방에 한국 마라톤의 기개를 떨쳤던 송길윤 선수(6회·작고) 등 중·장거리 육상 국가 대표를 배출했다.

탁구는 1960년 창단 이래 25년 동안 단체 우승 3회를 비롯한 준우승 4회, 개인우승 4회‧ 준우승 8회 등 야구 못지않은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전 군산상고의 주산부는 1954년 전국대회 제패 이후 7∼8년 동안 50여회의 전국대회 우승으로 전국 상업계의 명문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인재들의 활약으로 1962년부터 1977년까지 매년 50∼130명씩 금융기관에 취업, 한때 금융기관 종사자가 1,500여명에 달할 정도였고 금융기관의 지점장(부장 포함)만도 10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같이 금융기관에 대거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교직원과 학생이 혼연일체가 되어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노력해온데다 전국 최초로 도입한 영재합숙제도(교내 고시원)가 정착 운영된데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군산상고는 기로에 있다.

과거 전통적인 상업과에서 상업과 ‧전산과·회계과로 학과 개편이 이뤄졌는가 하면 최근 정보화 시대를 맞아 컴퓨터 그래픽· 사무자동화· 정보처리 등의 학과로 체제가 크게 바뀌는 등 능동적인 변화를 거듭해왔다.

이에 2008년부터 2010년, 2012년, 2019년 등에 이어 여러 과를 신설해왔다. 이렇게 생긴 과가 부사관과(2학급), 창업경영과(2학급), 금융정보과(2학급) 등이다.

문제는 저출산 및 실업계 고교의 진학 희망 저조로 인해 지난해부터 다시 인문계 고등학교로의 전환이 추진 중이다.

또한, 취업률도 20%대로 갈수록 낮아지고, 기초학력 부족으로 대학진학률도 낮은 등 갈수록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런 고민 때문에 2006년도에 인문계 고등학교로의 전환 및 전환 후 교명 변경(진포고등학교)을 추진했으나 무산됐고, 또 다시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고 있다.

동문들은 대체로 인문계 전환문제에 적극적인 찬성하는 입장이다.

다만 대표 브랜드라 할 수 있는 ‘역전의 명수’에 대한 해법 놓고는 갈 길을 잃고 있어 동문과 재학생, 학부모 등의 엄청난 고민과 지혜가 새로 모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역전의 명수 탄생

역전의 명수, 호남야구의 종가, 호남야구의 개척자.

야구에 관한 한 고교야구사의 중심에 우뚝서 있는 군산상고는 창단 50여년 동안 16번의 우승과 10번의 준우승 등 약 40차례 안팎에 걸쳐 전국대회를 평정하거나 상위권에 입상했다.

군산상고 출신으로 프로 무대와 국가대표선수로 활약했거나 현역에 있는 동문들은 숱하게 많다. 시쳇말로 이곳 출신만으로도 포지션별 국가대표가 나올 수 있을 정도란 말도 있다.

이런 전통 때문에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역전의 명수’ 시대별 발자취를 정리하는 이도 있다.

학교측이 자체홈페이지에 발표한 성적을 주로 참조했다.(전국대회 중 4대 메이저 대회 및 전국체전 이외에도 2000년대 이후엔 크고 작은 대회 우승도 포함)

창단과 영광의 70년대… 우승 6회와 준우승 5회, 3위 1회

지난 68년 3월 호남권에서 처음으로 고교야구부를 창단한 군산상고는 창단 3년째인 72년 7월 황금사자기를 거머쥐면서 명실공히 야구명문학교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황금사자기대회에서 당시 전국 최강을 자랑하던 부산고와의 결승전에서 9회초까지 1대4로 뒤져 패색이 짙었으나 9회말 5대4로 대역전극을 펼친 이후 최근까지 수차례에 걸쳐 역전승을 거둬 역전의 명수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한때 유명 야구 영화의 모델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자랑했을 정도다.

이때 활약했던 선수들로는 김봉연 전 극동대 교수(28회)과 김준환 전 원광대 감독(28회), 김일권(29회), 스마일 피처로 알려진 송상복(29회), 백기성 전 호원대 야구 감독(27회) 등이다.

당시 군산지역에는 중학교 2개팀과 초등학교 3개팀이 겨루면서 활약해왔으나 고교에 야구부가 없어 서울 등 외지로 진학하거나 학업을 중도 하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었다.

이 같은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당시 이용일 (주)경성고무의 대표이사가 군산에 야구팀을 창단할 것을 결심했고 곧바로 학교측과 협의, 인근 학교에서 졸업한 13명의 선수를 주축으로 야구부를 창단한 것.

그동안 여기에서 배출된 야구선수는 수백 명의 선수를 배출, 한국야구의 산실로서뿐 아니라 선도학교로 위치를 굳건히 해왔다.

전국적인 야구명문학교로 발전한 것은 경성고무 사장이자 전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이용일 전 사장의 든든한 후원과 집념, 그리고 군산시민들의 끊임없는 후원과 군산상고 동문들의 애교심과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

여기에다 고 최관수 초대 감독의 헌신적인 지도는 군산상고 야구의 만개를 이끈 힘이었다.

영광의 1980년대… 우승 7회‧ 준우승 5회‧ 5회

군산상고는 80년대들어 모교출신 지도자와 레전드급 선수들을 발굴하면서 명실공히 호남을 대표하는 야구고교로 부상했다.

그 중심에 전국구급 투수들이 등장한 것이다.

기아타이거즈 단장을 역임한 조계현은 1학년 때(1981년) 대통령배 우승을 이끌었고 다음 해 청룡기와 봉황대기를 거머쥐는 새로운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후 이광우와 정명원, 최해식 등이 중심이 돼 청룡기 우승(1984년)을 차지했다

왼손 투수 조규제가 1986년 대통령배와 황금사자기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특히 그는 대통령배에서 경남고를 상대로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2대1 역전승을 거두며 역전의 명수라는 신화를 확고히 만들었다.

명맥 지켜온 1990년대… 우승 3회‧ 준우승 3회‧ 3위 2회

영광의 80년대가 지나면서 침체 속에 빠졌지만 그래도 군산상고의 위상은 어느 정도 유지했다. 청룡기 준우승(1993년) 이외에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군산상고는 정대현과 이승호란 유명 투수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봉황대기 우승(1996년)에 이어 황금사자기 우승(1999년)을 이어갔다.

경제력 낙후와 연고 구단이 사라진 군산상고는 지역 인재들을 광주와 서울, 수도권 등지로 대거 빼앗기면서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암흑의 2000년대와 그 이후… 인재 유출 등 참극 진행형

‘우승 7회‧ 준우승 7회‧ 3위 3회(전국유명대회: 전국체전 각각 우승 및 준우승 2회, 봉황대기 우승 및 준우승 각 1회, 청룡기 준우승 1회, 대통령기 3위 1회)’

최근 20년간 전국대회에서의 성적은 자웅을 겨뤄왔던 명문고교에 비해 초라했다.

군산상고는 차우찬과 원종현 등의 활약으로 대통령배 4강(2005년)에 진출했을 뿐 창단 이후 최악의 시간을 보냈었다.

10년간 우승은 물론 4강 진출조차도 힘겨울 정도였다.

그나마 전국 무대에서 얼굴을 내밀었던 것은 2010년대였다.

2010년 봉황대기 준우승에 이어 2013년 조현명 선수가 주축이 되어 봉황대기 우승과 전국체전 우승 등을 엮어냈다. 2016년엔 김영중의 호투로 봉황대기 준우승과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일궈냈다.

2021년엔 청룡기대회 내내 승승장구했지만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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