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야구'로 주목받은 '조선인 학생' 김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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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안 記者의 '군산 야구 100년사'] '야구'로 주목받은 '조선인 학생' 김판술
  • 조종안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승인 2020.04.0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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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野球)는 국운이 쇠약해진 구한말(1904)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에 의해 이 땅에 싹을 틔웠다.

최초 전국규모 대회는 조선체육회가 결성되는 1920년 11월(14일~16일) 배재고보 교정에서 열린다.

대회 명칭은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 이는 오늘날의 전국체육대회 기점이 된다.

제1회 호남초등학교 야구대회 시상식./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제1회 호남초등학교 야구대회 시상식./사진 출처=군산야구 100년사

위는 1928년 전북 이리체육회가 주최한 제1회 호남중등학교 야구대회(9월 15일~16일) 수상식 장면이다.

1910~1920년대 우리나라 야구는 선수들을 지도하고 육성할 만한 통일된 기관이 없는 데다 룰(rule)도 엉성하였다.

시합도 친선경기나 대항전이 산발적으로 열리다가 충청·전라지역 중등학교가 참가하는 최초 지방대회여서 여러 의미를 지닌다.

제1회 호남중등학교 야구대회는 이리 철도운동장에서 열렸다.

참가팀은 목포상업, 강경상업, 전주고보, 이리농림, 군산중학교(아래 군산중) 등 다섯 개 팀.

이 대회에서 군산중은 2회전에서 전주고보를 2-0으로 완파하고 결승에 올라 목포상업을 4-2로 물리치고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당시 군산중 야구팀은 주장 요시오(吉尾·2루수)를 비롯해 후지타(藤田一·중견수), 츠지모토(辻本·1루수), 나카니시(中西·투수 겸 우익수), 마시코(益子·유격수), 김판술(金判述·좌익수), 마루이(丸井·3루수), 후지타(藤田茂·포수), 미나미무라(南村·우익수 겸 투수) 등 9명으로 김판술을 제외한 선수 모두가 일본인 학생이었다.

유일한 조선인 선수였던 김판술은 군산심상고등소학교(현 군산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군산중 선수 시절 중심타자로 맹활약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인지 1929년 제작된 군산중 2회 졸업앨범은 김판술 선수의 멋진 수비 모습 사진을 요시오(주장) 선수 타격 연습 장면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조선인 선수 김판술, 그는 누구?

 

1971년 10월 전국체전때 응원하는 김판술 이용일 강선국씨(왼쪽부터)/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1971년 10월 전국체전때 응원하는 김판술 이용일 강선국씨(왼쪽부터)/사진 제공=조종안 기자

 

김판술(1909~2009)은 군산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선배들을 따라 삼일만세운동(3·5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재학생들의 교사(校舍) 방화시위로 수업을 못 하게 되자 군산심상고등소학교로 옮겨 야구를 시작했다.

졸업 후 군산중학교에 입학, 야구선수로 활약한다.

1929년 군산중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우쓰노미야(宇都宮) 고등농림농학과에 다닐 때까지 4번 타자로 활약하다가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농학부 농림화학과로 진학해서 선수 생활을 그만둔다.

광복과 함께 군산에서 <신광일보>(1945년 9월 20일)를 창간하였고, 군산수협 초대 조합장(1945~1949)을 지냈다.

농림부 농정과장을 거쳐 민주국민당에 입당, 군산 지구당 최고위원이 된다. 제3대 민의원 선거(1954), 제5대 민의원 선거 때(1960) 군산·옥구에서 당선된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고 약한 서민의 편에서 정치를 해왔고, 또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3대 국회의원 시절(1957년 11월) 중앙청 광장에서 개최된 행정부-입법부 친목 야구 시합 때 선수로 뛰었으며, 군산상고 경기 때마다 운동장에 나와 열띤 응원을 펼칠 정도로 야구를 사랑하였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제7대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로 4개월 만에 물러난다. 1967년 신민당 운영위원을 지냈으며, 제11대 국회의원 총선 때(1981) 서울 종로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 최고령 당선자가 된다.

당시 나이 일흔둘.

김판술은 3선 의원(3대, 5대, 11대)으로 민주한국당 자문회의 의장, 민주한국당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1987년 평화민주당 고문 및 당무지도위원회 의장, 1991년 민주당 당무위원을 지냈다.

2007년부터 대한민국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2009년 3월 31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계속)

 

 

 

 

조종안 기자는?

조종안 기자
조종안 기자

조종안 기자는 늘 발품을 판다.

현장 곳곳을 누비며 쓰는 그의 기사는 그래서 맛깔난다.

관념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현장에서 다양한 취재거리와 호흡하며 소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취재 열정과 집념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은 자신의 이름이 또렷하게 인쇄된 여러 권의 책이다.

이번에 '투데이 군산'에 새롭게 내용을 보완해 연재하는 <군산야구 100년사(2014)>를 비롯해 <군산항에 얽힌 이야기들(공저/2017)> <군산 해어화 100년(2018)> <금강, 그 물길 따라 100년(2018)>이 대표적이다.

그를 대변해주는 논문도 꽤 있다.

2013년에 군산대 인문과학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주제발표한 [기록으로 보는 이영춘 박사-그가 겪은 고난 10가지]등은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라도 권번 문화예술에 대한 가치제고(2018)>라는 주제발표도 대표적인 그의 열정과 집념의 산물이다.

그는 2005년 인터넷신문 <플러스코리아>에서 처음 언론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인터넷신문 <신문고 뉴스> 논설위원 및 편집위원을 지냈다.

지금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 중이다.

한국전쟁 발발 때 세상의 빛을 봤다는 그가 올해로 일흔의 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취재 현장 곳곳에서 만나본 그는 여전히 젊다.

/ '투데이 군산' 뉴스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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